특집


EU와 영국 덮친 브렉시트 후폭풍

영국 청년들이 분노하는 까닭

현실적인 보수주의자, 테레사 메이 신임 총리

브렉시트에도 꺾이지 않은 코빈 지지세

트럼프와 힐러리의 ‘브렉시트 손익계산서’


 

“영국 친구분들께 충고 한마디만….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 (달콤한 것만 취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지 마시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6월28일 오랜 친구인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만나러 벨기에 브뤼셀 유럽정상회의 장소로 날아가기 전, 연방의회부터 들렀다. 의회 연설에서 그녀는 국민투표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결정한 영국인들에게 모진 말을 쏟아냈다. ‘의무(이민자 수용)’를 회피하며 ‘특권(EU 시장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누릴 꿈은 꾸지도 말라는 얘기였다. 메르켈은 이후 영국과의 협상에서 “맛있는 것만 쏙쏙 빼먹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선언해, 의원들로부터 뜨거운 환호를 받아냈다.

영국 EU 탈퇴파 정치인들의 막연한 기대를 무자비하게 꺾어버린 발언이었다. 유럽연합(EU)은 회원국 사이에 상품·자본·인력 등의 자유로운 이동을 기본 원리로 하는 정치·경제 공동체다. 기업은 다른 회원국에 무관세로 품목 제한 없이 수출할 수 있다. 시민들 역시 EU 안에서라면 어떤 국가로든 이주해서 공부하고 직업을 가지며 정착할 수 있다. 자유무역은 자유 이동의 대가다.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 등 EU 탈퇴를 주도한 정치인들은, 브렉시트가 이뤄지면 영국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물결을 막을 수 있다고 선동해왔다. EU 측과 성공적 협상을 통해 영국 기업과 시민들은 앞으로도 계속 유럽 대륙에 무관세로 수출하거나 자유롭게 건너갈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맛있는 것만 빼먹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6월28일 열린 유럽정상회의의 분위기는 영국에 싸늘하고 냉소적이었다. 캐머런 영국 총리는 브뤼셀에 도착하자마자 낸 성명서를 통해 “영국은 EU를 떠나겠지만, 탈퇴의 과정과 결과가 양측 모두에 건설적이기 바란다. 영국이 EU를 떠난다 해도 유럽에 등을 돌릴 수 있겠는가”라고 호소했다.

ⓒAFP

EU 규범에 따르면, 탈퇴를 결정한 나라는 이를 EU에 공식적으로 통보해야 한다. 통보와 동시에 탈퇴 절차를 규정한 리스본 조약 제50조(이하 제50조)가 발동된다. 영국은 이 시점부터 2년 동안 회원국 자격을 유지한 채 EU 측과 무역·투자·이민 등의 부문에서 협상을 벌여 양측 관계의 새로운 틀을 만든 뒤 비로소 탈퇴하게 된다. 다만 영국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협상 개시 시점을 뒤로 미루고 싶어 하는 눈치다. 캐머런 총리는 브렉시트 투표의 개표가 완료된 6월24일 오후 “오는 10월에 사임하겠다”라고 밝히면서도 자신이 ‘제50조를 발동(협상 개시)’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후임 총리에게 짐을 넘긴 것이다. 아마도 차기 총리 역시 협상 개시를 서두르지 않을 듯하다.

유럽의회의 조롱거리가 된 영국

그러나 유럽 대륙의 정치인들은 영국 측 의도를 고스란히 받아줄 만큼 속이 넓지는 않았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현장 스케치에 따르면, 유럽정상회의가 열린 6월28일 유럽의회에서도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이 영국독립당 나이절 패라지 대표를 보고는 “당신, 그동안 탈퇴를 위해 싸웠잖아. 영국 시민들로부터 지지도 받았잖아. 그런데 여긴 왜 오셨어? 진심 깜짝 놀랐네”라며 힐난했다. 영국독립당은 외국인 혐오 정서를 부추겨 제3당으로 떠오르면서 브렉시트를 주도한 정당이다. 곧이어 연단에 오른 패라지는 “이제 나를 비웃지 못하겠지? 뜨거운 환영에 감사한다”라고 비아냥거리며 의원들을 놀렸다. “당신들, 앞으로 다시는 여기에서처럼 좋은 일자리 구하지 못할 거야.” ‘EU가 그대로 유지될까?’라는 속내를 담은 공격이다. ‘영국에 대항하는 무역장벽 따위는 만들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깐죽거리는 말투 속에 ‘영국에 유리한 탈퇴 협상’이라는 비원(悲願)을 담은 것이다. 다른 의원들이 야유를 보내자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이 진정시켰다. “여러 의원들이 흥분한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영국독립당이 평소 하는 짓을 따라 해서야 되겠는가?” 패라지를 편들어준 발언이 아니다. 패라지를 응원한 의원은 단 한 사람.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 대해 “‘시민들의 봄(프라하의 봄을 원용한 듯)’이고 ‘사랑의 외침’이며, 영국인들을 해방시킨 ‘자유의 상징’”이라고 읊은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뿐이었다.

ⓒAP Photo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앞줄 오른쪽)는 영국이 “맛있는 것만 쏙쏙 빼먹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EU 정상들은 단호하다. 첫째, ‘영국은 제50조를 신속히 발동하라.’ 빨리 협상을 마치고 EU를 떠나라는 것이다. 아쉬워하는 내색은 조금도 비치지 않는다. 둘째, 협상의 마지노선을 명확하게 그었다. 캐머런과 존슨, 패라지가 바라듯 영국은 EU 단일시장 접근권이라는 ‘권리’와 이민자 수용이라는 ‘의무’를 둘 다 갖든지 모두 버려야 한다.

EU 시장 접근권과 이민 봉쇄라는 ‘두 마리 새’를 모두 잡겠다고 호언장담해온 영국 탈퇴파 정치인 처지에서는 난감한 사태다. 그러나 EU 처지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 특혜를 준다면 이를 흉내 내는 다른 회원국들이 속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EU의 존속이 위태로워진다. 더욱이 독일과 프랑스 집권당의 경우 영국이 탈퇴 후에도 ‘잘나가면’ 자국 내에서 급속히 성장 중인 극우 정당들에게 정권을 내주게 될지도 모른다. EU 차원에서나 유력 회원국 내부의 정치 동학으로 보나 영국에는 단호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 6월28일 정상회의는 이를 확인한 행사였다.

브렉시트 주역들 사이에 꼬리를 문 배신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브렉시트의 주역들 사이에서 내홍이 터졌다. 정상회의 이틀 뒤인 6월30일, 캐머런의 후임으로 가장 유력했던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이 보수당 대표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다수당인 보수당 대표는 자동적으로 영국 총리를 맡게 된다. 브렉시트 투표 개표 당일만 해도 차기 총리로 유력했던 그가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브렉시트 운동에서 그를 헌신적으로 보좌하며 충성을 바치는 것으로 ‘보였던’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은 “존슨은 지금처럼 엄중한 상황을 헤쳐나갈 리더십을 가지지 못했다”라며 출마를 선언했다. 영국 언론에서는 고브를 셰익스피어 희곡 〈맥베스〉의 맥베스(모시던 덩컨 왕을 살해하고 왕좌에 등극)나 〈줄리어스 시저〉의 브루투스(시저 암살자) 등에 비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또 다른 후보인 테레사 메이 내무장관(현실적인 보수주의자, 테레사 메이 신임 총리 참조)이 차기 총리로 더욱 유력해졌다. ‘EU 잔류파’였던 그녀는 “(총리가 되면) 올해 연말까지 “제50조를 발동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과연 영국은 6·23 투표의 결정을 실행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 영국의 EU 탈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상되는 앞날이 너무 암담하다. 개표 당일인 6월24일부터 27일 사이 영국 파운드화는 미국 달러화에 대해 무려 14% 가까이 폭락했다. 달러와 파운드 등 글로벌 기축통화들 간의 환율이 이렇게 큰 폭으로 변동하기는 힘들다. 지난 몇 년 동안 달러화 대비 파운드화 환율의 하루 변동 폭은 0.3% 정도였

ⓒ연합뉴스브렉시트가 결정되자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했다. 당일 코스피는 1900선이 무너지고 코스닥 시장에는 ‘사이드카’가 발동되었다.

다. 영국 주식시장도 폭락했다. 6월28일부터 ‘최초의 흥분’에서 벗어난 금융시장이 조금씩 반등하는 추세다. 그러나 이는 시장 참여자들이 ‘브렉시트가 당장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영국 실물경제가 현격히 위축될 것이다. EU가 협상에서 강경한 노선을 견지할수록 영국 경제의 전망 역시 어두워져 투자 감소와 고용난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한 불황에, 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적절히 대처하기도 힘들다. 이미 0%에 가까운 기준금리를 얼마나 더 내릴 수 있을까? 유럽중앙은행(ECB)처럼 ‘마이너스 금리’로 넘어가면, 파운드화의 인기는 급락하고, 자본 유출이 본격화된다. 영국 경제의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 체질을 감안하면, 금융위기로 폭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브렉시트로 예상되는 고난이 엄혹한 반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도 의외로 많다. 더욱이 브렉시트의 실현까지 필요한 시간은 길다. 최소한 2년6개월이다. 먼저 영국 의회 차원에서 브렉시트를 거부할 수 있다. 영국은 1972년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했다. 의회는 EEC 가입의 법률적 근거로 ‘유럽공동체법’을 통과시켰다. EU를 탈퇴하려면, 의회가 유럽공동체법부터 폐기해야 한다. 제50조 발동은 그런 다음의 절차다. 만약 의회가 이 법률의 폐기를 거부한다면 브렉시트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국민투표를 다시 치를 수도 있다. 협상이 개시된 이후, EU로부터 지금보다 나은 조건(예컨대 이민자 수 제한)을 보장받으면, 이를 전제로 제2차 브렉시트 투표를 시행하는 방법이다. 전례도 있다. 덴마크와 아일랜드의 경우, EU 관련 조약을 두 차례 국민투표를 거쳐 승인했다. 물론 재협상을 통해 당초보다 더 좋은 조건을 보장받았다. 보리스 존슨 역시 2차 국민투표를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3월 〈텔레그래프〉에 “역사적으로 EU는 ‘안 돼(No)!’라고 부르짖어야 귀를 기울인다”라고 썼다. 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엔 “영국은 EU의 일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 탈퇴파 수뇌부들이 이번 국민투표를 EU에 대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혹은 2020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앞당기면서 이에 ‘제2차 브렉시트 투표’라는 정치적 함의를 담는 방법도 있다.

한편 영국 상원은 지난 4월 보고서를 통해 잉글랜드뿐 아니라 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웨일스 등의 의회가 모두 승인해야 브렉시트의 법률적 정당성이 충족된다고 주장했다. 니컬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총리는 이미 브렉시트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영국의 차기 총리는 ‘스코틀랜드의 승인을 얻지 못해서 제50조를 발동할 수 없다’고 우길 수도 있다.

6·23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이민 반대와 인종주의를 무기로 삼은 영국 극우파의 승리로 일단 마무리되었다. 중도 보수 성향인 보수당 정치인들까지 외국인 혐오 분위기를 자신의 권력 장악에 활용하려 했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보리스 존슨에게 배신당했고, 존슨은 다시 마이클 고브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 그러나 ‘브렉시트 이후’의 국면은 EU 측의 반격과 영국 우파 세력의 분열로 시작되고 있다. 국가주권(EU 집행위원회 대 회원국 정부), 재정정책(긴축 대 정부지출 확대), 인권·민주주의(대의정치 대 국민투표) 등 EU와 얽힌 수많은 이슈들이 정세 변동에 따라 일제히 분출되어 얽히고 싸우며 새로운 흐름들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브렉시트라는 사건’은 국민투표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서막이 열렸을 뿐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