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3일부터 17일까지 고려대에서 열린 NPKI(새로운 물리학 한국연구소) 학회에 참석한 물리학자들 중 단연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이는 미국 하버드 대학 물리학과 교수 리사 랜들이었다. 리사 랜들은 1999년 발표한 ‘랜들-선드럼 모형’으로 물리학계의 스타로 떠오른 입자물리학자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MIT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하버드에 자리 잡은 랜들은 ‘랜들-선드럼 모형’ 발표 후 5년 동안 인용 횟수가 가장 많은 물리학자였다. 〈뉴스위크〉는 그녀를 “우리 세대의 가장 유망한 이론물리학자”라고 말했다. 그녀는 책을 쓰는 데도 관심이 많아 지금까지 〈숨겨진 우주〉 〈이것이 힉스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를 펴냈고, 6월에는 신간 〈암흑 물질과 공룡〉도 나왔다.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어 리사 랜들의 이름을 물리학계 너머로 알렸다.
리사 랜들의 난해한 연구를 한두 문장으로 소개하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므로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잘 설명한 〈숨겨진 우주〉를 읽어보라고 권하는 수밖에 없겠으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이론을 간접적으로 접한 계기가 있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했던 ‘5차원 가설’이 그것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차원의 힘이, 지금껏 4차원으로만 알려졌던 우리 세상에 미친다는 영화의 설정을 기억하시는지? 랜들의 이론은 새로운 ‘휘어진 여분 차원’을 가정함으로써 세상을 5차원으로 확장하고, 그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 세상에서 중력이 이렇게 약한 이유를 설명한다. 중력이 전자기력 같은 다른 표준모형 힘들에 비해 지나치게 약한 까닭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입자물리학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다.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의 딸인 천재 물리학자 머피에게서 랜들을 겹쳐 본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랜들을 소개할 때 반드시 따라붙는 설명이 더 있다. 그녀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여성 최초로 물리학 종신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하버드로 옮길 때도 여성 최초로 이론물리학 종신 교수로 임명되었다는 설명이다. 거기에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언급도 으레 따라붙는다. 한마디로 그녀는 보기 드문 ‘여성’ 물리학자이다.
보통 사람에게 여성 물리학자의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어떤 답이 나올까? 보나마나 마리 퀴리일 것이라는 데 나는 큰돈을 걸겠다. 퀴리 외에 다른 이름을 대보라고 한다면? 십중팔구는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라는 데 아까보다는 좀 적은 돈을 걸겠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토 한과 함께 핵분열을 발견했으나 노벨상을 받지 못했던(오토 한만 받았다) 리제 마이트너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랜들이 〈암흑 물질과 공룡〉에서 긴 지면을 할애해 소개한 베라 루빈도 빼놓을 수 없다. 천체물리학자 루빈은 나선은하 속 별들의 회전속도를 연구하다가 그 속도가 은하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와 무관하게 일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로부터 은하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암흑 물질’이 존재해 그 중력이 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러니 루빈은 암흑 물질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그런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프린스턴 대학원 입학을 거절당했던 일화도 꼭 함께 이야기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널리 인정받았던 여성 물리학자들도 있다. 랜들과 같은 입자물리학계에서는 패리티(반전성) 보존 법칙 위반을 실험으로 증명했던 우젠슝이 맨 먼저 떠오른다. 패리티 위반을 이론으로 예측했던 리정다오와 양첸닝은 노벨상을 받았는데 우젠슝은 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뒤이어 떠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힉스 입자 발견으로 유명한 대형강입자충돌기(LHC)를 운영하는 유럽 핵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첫 여성 소장으로 선출되어 올해부터 일하고 있는 파비올라 자노티도 있다. 가속기 하면 또, 시카고 대학 교수로 페르미 가속기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던 한국 출신 입자물리학자 김영기도 떠오른다. “높이 올라갈수록 (여자가) 적어진다”라는 케냐의 정치운동가 왕가리 마타이의 말이 물리학계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므로, 물리학계 전체로 시야를 넓혀본다면 더 많은 여성 물리학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계에서도 뚜렷한 ‘여성 경력 단절’
그러나 물리학계에 여성이 적다는 것, 생물학이나 의학 같은 다른 과학 분야에 비해서도 그렇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다. 더구나 물리학은 단지 여성이 적을 뿐 아니라 여성이 잘 못하는 학문이라는 고정관념도 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최초의 여성 물리학 교수로 이휘소 박사와 함께 참쿼크의 질량을 예측했던 메리 K. 게일러드의 회고록 제목을 빌리자면, 물리학은 “지극히 비여성적인 직업”이다. 사정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한국물리학회 여성위원회가 2005년, 2010년, 2014년에 실시했던 조사에 따르면, 물리학회 참가자 중 여성의 비율은 2005년에 13%였던 것이 2014년에는 31%로 늘긴 했으나 여전히 3분의 1이 못 된다. 더구나 30대 이상 여성의 비율은 훨씬 적어, 물리학계에서도 육아와 가사로 인한 여성의 경력 단절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자연히 의문이 든다. 여성의 경력 추구를 가로막는 여러 보편적인 제도적·문화적 장애물 외에 물리학계에 유달리 여성이 적을 이유가 있을까? 물리학은 정말로 속성상 ‘비여성적인’ 학문일까? 답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역시 얼마 전에 번역된 책 〈평행 우주 속의 소녀〉가 실마리는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일 대학 물리학과의 첫 여성 졸업생이었던 저자 아일린 폴락은 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고 여러 연구 결과를 살펴보며 현장을 취재했다. 결론은 이렇다. “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흔히 다른 여러 분야에도 재능이 있으며, 어떤 재능을 더 살려야 할지를 결정할 때, 좀 더 긍정적인 피드백을 제공해주는 분야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다른 어떤 요인들보다도 여성은 물리학을 잘하기 어렵다는 부정적 암시가 넘치는 환경과, 역할 모델이 될 여성 물리학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2005년에 당시 하버드 총장 로런스 서머스는 “과학계에 여성 종신 교수가 드문 것은 과학의 최상위 수준에서는 남녀가 소질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 서머스가 랜들의 책을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한 것은 묘한 아이러니다. “리사 랜들은 말 그대로 희귀한 존재이다. 천재 물리학자이면서 그렇지 못한 우리도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쓰고 강연을 한다.” 서머스를 둘러싼 그 복잡했던 소동을 아는 사람이라면, 서머스의 의도와는 달리 이 말에서 랜들이 ‘희귀한 존재’인 것은 무엇보다도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말 것이다.
어떻게 보면 리사 랜들의 명성 자체가 딜레마다. 랜들이 ‘희귀한 여성’이라서 유달리 주목받는 것은 좀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세상이 오려면, 그녀와 같은 여성 물리학자가 지금보다 더 많이 알려지고 전면에 드러나고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리사 랜들이 뛰어난 물리학자이자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희귀한 여성’으로 호명되는 상황을 아직은 반대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