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최 측에서 강의 제목을 ‘조금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라고 붙인 걸 보고 많이 놀랐다”라며 김가영 생생농업유통 대표는 웃었다. 자신은 조금 다르게 산 것이 아니라 ‘엄청’ 다르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시작은 작은 차이에서 비롯됐다. 약간의 차이가 한 사람의 진로와 그 주변 세상을 다채롭게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6월14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진행된 여섯 번째 강좌 중 일부를 지상 중계한다.

오늘 아침 부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에 다녀왔다. 나를 낳아준 친어머니는 아니다. 하지만 나를 늘 품어주시던 어머니 중 한 분이다.

스무 살부터 서른한 살까지 지난 10년간 농사짓고 밥 짓는 삶을 살아오면서 여러 부모를 만났다. 나보다 훨씬 연세 드신 그분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말투나 생각이 너무 많이 닮아버린 것 같다. 요즘엔 할머니들조차 저보고 “니 속에 할매 있다”고 하실 정도다(웃음). 그럼에도 오늘 이 자리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돌이켜보면 이렇게 다양한 부모님들이 저라는 이상한 개체를 품어주셨던 덕분인 것 같다.

ⓒ시사IN 조남진 김가영 대표는 ‘공부는 잘하고 잘사는데 날마다 저질 식품만 먹는 젊은이들’과 ‘좋은 것을 먹고 살지만 늘 가난한 어르신들’ 사이를 이어주고자 한다.

나는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장률이 두 자릿수였던 미친 시대에 태어난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어찌 보면 불행한 세대이기도 하다. 부귀영화를 입에 물고 태어났건만, 앞으로는 평생 내 손으로 그 부귀영화를 다시 일구지 못할 것임을 예감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세대이기도 하니까. 그에 비하면 나보다 4~5년 뒤에 태어난 1990년대 초반 세대는 훨씬 소박하고 판단이 현실적인 것 같다.

요즘 20대에 비해 30대 창업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이런 영향인 듯하다. 이 친구들을 보면 사회를 구하겠다기보다는 부모 세대처럼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보겠다는 가족주의에 기반해 돈을 벌어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이런 친구들을 ‘참 대단하다’고 칭송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왜 돈을 벌려 하는지, 왜 기업을 하려 하는지 자꾸 묻는 사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왜 이런 얘길 하는지 의아해하실 수도 있겠는데, 이는 조만간 이들 30~40대가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이 여러분의 자녀 세대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인 만큼 이들이 이끌어갈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나는 학교에서 소통을 잘 못하는 학생이었다. 여자애들이 ‘H.O.T냐 젝스키스냐’를 두고 사생결단 싸울 때 나는 <리니지>(1990년대 후반부터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온라인 게임)만 파고들었다. 나름 <리니지> 만렙(게임에서 지원하는 최대 레벨)을 찍은 중학생으로 온라인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나는 자폐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의심되는 학생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중3 때 선생님이 내게 선린인터넷고 진학을 권했다. 그 학교에 가면 원 없이 게임을 할 수 있을 거라면서. 선생님은 내가 걱정돼 고등학교에 다섯 번이나 다녀오셨다고도 했다. 결국 나는 선린인터넷고에 진학했다. 외고에 진학하기를 바랐던 엄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추가모집 때 몰래 원서를 제출했다.

고교 때의 난 중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학생이었다. 다른 건 여중 때와 달리 남학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환경의 차이 정도였다. 그런데 내 삶은 180° 달라졌다. 남자아이들과 PC방에 한번 다녀왔더니 아이들이 나를 반장으로 만장일치 추대했다. “반장은 당연히 우리 (<리니지>) 동맹의 맹주가 해야 하는 것 아냐?”라면서(웃음). 2~3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비로소 안심했다. ‘그간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구나’ 싶어서였다. 난 달라진 게 없다. 그저 남학생과 여학생이 각각 많은 환경에서의 장점이 달랐던 것뿐이다. 다시 말해 판이 요구하는 능력이 달랐던 것이다. 그런 만큼 아이가 큰 문제가 없는데도 학교생활이나 교우 관계에서 의기소침하게 지낸다면 판을 한번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대학은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선택했다. 프로그래밍 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도 했고, 고교 시절 창업한 경험도 있는 만큼 난 내가 이공계로 진학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경험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당시 난 입시 과목에 들어가지 않던 사회를 학교에서 유일하게 듣던 학생이었다. 담당 선생님이 좋았던 데다 새로 접한 인문·사회과학 책들이 어린 마음을 끓어오르게 했다. 본래 연극을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 반대로 간호학과에 진학했다던 양호 선생님 또한 내게 영향을 주었다. 선생님은 양호는 뒷전이고 연극 재량활동 지도에 열을 올리시더니 끝내 연극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으셨다. 그때 깨달았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하는 거구나.’ 그 결과 외환위기(IMF) 때 망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강박감을 버리고 사회학과를 선택한 것이다.

소비자보다 생산자와 더 친한 농산물 유통업자

그렇게 입학했건만 대학에서의 삶이 순탄치는 않았다. 1학년 첫 학기 받아든 학점이 1.35였다. 주변은 공부 잘하는 애들, 잘사는 애들, 예쁜 애들 천지인 것 같았다.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다. 사회 분위기가 급격히 경색되면서 기업들도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출신이 아니면 아예 안 뽑는다는 식으로 나왔다. 불안했다. 뭘 먹고 살아야 할지 정말 두려웠다.

마침 추진하던 일이 잘 안 되면서 도망치듯 대구로 내려갔다. 거기서 만난 사람 집에 얹혀 2개월을 살았다. 스무 살에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해본 셈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남들과 조금 다르게 살기 시작한 것이 삶의 방향이나 삶을 바라보는 크기 자체를 바꿔버린 듯하다. 일반적으로 놓인 길에서 각도를 1˚ 벌려 다른 길을 갔을 뿐인데 나중에는 두 길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생겨났달까. 사실 자녀가 틀어지는 걸 견딜 수 없어 하는 건 부모의 본능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렸을 적 1˚만 각도를 틀어주시면 스스로 품은 역량에 따라 자녀들이 언젠가 부모를 넘어설 수도 있음을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대구에서 뭘 할까 두 달을 고민한 끝에 경북 청송, 전남 곡성 등을 전전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처음엔 할머니들이 빌려준 땅에 상추를 심었는데, 5~6월이면 이것들이 얼마나 미친 듯이 자라는지 대학에 복학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상추가 끝나면 고추 등 다른 농사를 짓느라 도무지 짬이 안 났다. 그러다가 유통업에까지 뛰어든 것은 할머니들 때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농사지은 상추를 거의 다 내다팔았다. 조금 관찰해본 결과 어떻게 하면 팔릴지 눈에 보였다. 그런데 이걸 할머니들이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도대체 왜 그러세요?” 따졌더니 “얄미워서 그런다”라고 하셨다. 자기들이 농사지은 것도 함께 팔아달라면서.

ⓒ소녀방앗간 페이스북 김 대표가 운영하는 밥집 ‘소녀방앗간’의 메뉴는 생산자 공급 계획에 맞춰 1년 전에 미리 기획한다.

그때부터 마을 이장님 차를 몰래 빌려 할머니들 농산물까지 팔고 다녔다. 취급하는 품목과 물량이 많아지면서 나중에는 상인들이 오히려 나한테 “더 팔 게 없냐?”라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너무 바빠지면서 내 밭 건사는 그냥 동네 할머니들한테 맡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유통업자가 된 것이다. 아마 이마트 같은 대형 유통업체에선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나는 소비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일반 유통업자와 달리 생산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유통업자이기 때문이다.

장사 규모가 커지면서 나중에는 유통회사를 차리고, 폐교를 사들여 사무실로 개조해 썼다. 회사에서 번 돈으로 할머니 집 지붕도 고쳐드리고, 조손 가정도 돕는다. 이분들의 삶을 보면 참 기가 막힌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평생을 바람피우는 남편에 속 썩이는 아들 뒷바라지하다 궁극에는 손자까지 키우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나는 ‘이분들이 마지막 가는 길만은 존중받고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파는 농산물은 그냥 농산물이 아니다. 이분들의 60~70년 생애를 제값 받고 팔지 못하면 이분들의 역사 또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우리 농업 살리기 운동이 소비자 건강을 강조하는 쪽으로 치우치는 것도 유감이다. 진짜 건강하게 살려면 아예 도시에서 숨을 쉬지 말아야지(웃음). 우리 농산물을 이용하는 진짜 이유는 이분들의 삶을 예우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껏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이분들의 삶이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국 사회 또한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말한다. “난 소학교도 못 갔어. 김 사장은 대학 졸업하는 것 보고 싶어”라고. 내가 10년째 휴학에 휴학을 거듭하면서 대학에 적을 걸어둔 이유도 이것이다. 잘나가는 사람은커녕 대학 졸업한 사람조차 주변에 거의 없는 이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이로써 학벌이라는 게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 또한 보여주고 싶다.

“나도 살았잖아, 그러니까 너네도 살아”

유통회사에 이어 지난해부터는 서울에 ‘소녀방앗간’이라는 밥집도 운영 중이다. 할머니들이 지금 모습 그대로 농사짓는 걸 지원하는 유통구조를 만들려면 한식집을 해야겠다는 판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집 메뉴는 1년 전에 미리 기획한다. 내년에 호박고지를 스무 번 반찬으로 내자 싶으면 그 전해 가을에 미리 필요한 양을 다 말려두는 식이다. 사실 소비자들은 호박고지보다 애호박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애호박은 한창 바쁜 농번기에 농사를 지어야 한다. 반면 호박고지는 추수를 다 마친 뒤 한가할 때 제멋대로 자라 있는 호박을 썰어 말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우리는 호박고지를 더 많이 쓰게끔 식단을 짜는 것이다.

반찬도 세 가지밖에 없다. 김치를 빼면 2찬이 전부다. 생산자에게 헐값으로 100을 사오면 그중 70을 소비하고 30은 버리는 게 지금까지의 식당 구조였다. 그러나 소녀방앗간은 생산자에게 제값을 쳐줌으로써 70만 사오고 버리는 것이 없게끔 하는 방식을 지향하고자 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음식물 처리업체를 이용하지 않는 밥집으로도 유명하다. 처음엔 처리업체를 이용할까 했는데 그쪽에서 오히려 “이 집은 가정용 음식물 쓰레기봉투만 사용해도 충분할 것 같다”고 말하더라.

나는 소녀방앗간이 밥집이라기보다 소통 채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밥집에 오면 직원들이 “오늘 메뉴는 취나물과 다래순을 섞은 것인데, 다래순은 5월에 할머니들이 훑어 가져온 것이다”라는 식으로 그날의 식단을 일일이 설명한다. 손님들이 궁금해하는 게 있으면 이를 할머니들에게 물어 답변을 대신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도시 사람들이 농산물이란 게 절로 자라 식탁에 놓인 게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으면 한다. 공부는 잘하고 잘사는데 날마다 거지 같은 것만 먹는 내 또래 친구들과, 좋은 것을 먹고 살기는 하는데 늘 가난한 어르신들, 이들 사이에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착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분들의 역량을 충분히 배워두려는 것뿐이다. 사실은 우리가 얻는 것이 훨씬 많다.

지난해 서울 성수동에 1호점을 연 소녀방앗간은 현재 이대 앞 6호점까지 늘어났다. 올여름에는 서귀포에 들어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7호점을 낼 계획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장 잘하는 건 돈 버는 일이라 할 수 있다(웃음). 자본주의가 가장 좋아하는 특기를 타고난 셈이다. 다만 누군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파산해야 하는 게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나의 특기는 남을 죽이는 일인 셈이다. 슬픈 특기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일은 이것과 정반대다. 나는 예술적인 일, 창조적인 일처럼 ‘살리는 일’을 좋아한다. 프로그래밍을 하기 전에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농사로 돈 버는 일을 하니 특기와 취미가 따로 노는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런 내가 이 땅에 발붙이고 숨 쉬며 살아온 게 어찌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가끔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도 살았잖아. 그러니까 너네도 살아”라고. 그 어느 때보다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많은 친구들에게 오늘 얘기가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김가영 (생생농업유통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