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전자의 근무 환경을 감시할 옴부즈맨 위원회가 출범했다. 몇몇 언론은 이로써 삼성 백혈병 문제가 ‘일단락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를 접하며 떠오른 정치인이 있다. 2012년 10월15일의 안철수다. 대선 후보 안철수는 녹색병원을 찾아 휠체어를 밀었다. 휠체어에 탄 이는 한혜경씨.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6년간 일하다 뇌종양에 걸려 투병 중인, 이른바 ‘삼성 백혈병’ 피해자였다. 다분히 기획된 만남이지만, 여운이 오래갔다. 삼성을 겨냥한 이벤트를 한 대권 후보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 안철수가 유일하다.

삼성 백혈병이 마무리됐다는 보도만 보면, 그때 안철수 후보가 만났던 혜경씨도 사과를 받고 보상을 받아 병원이나 집에서 치료를 받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혜경씨는 아직도 길거리에 있다. 매주 토요일,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스팔트에서 한뎃잠을 잔다.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앞, 44층·38층·32층짜리 삼성타운. 그 거대한 건물 아래 비닐 천막이 쳐졌다. 가랑비가 내리던 6월15일, 253일째 거리 농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해 가을에 시작한 농성은 겨울과 봄을 지나 여름을 맞았다. 언론 보도와 거리 농성의 간격은 커 보였다. 삼성은 시민단체의 ‘어깃장 농성’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한혜경씨와 황상기씨 등을 제외한 피해자들이 만든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 쪽과 사과와 보상을 마쳤기 때문이다.

삼성·반올림 양자 대화로 시작한 협상은 반올림에서 피해자들이 따로 나와 가대위를 꾸리면서 더디게 진행됐다. 조정위원회(조정위) 설립을 제안한 쪽은 가대위였다. 삼성은 찬성했다. 반올림은 거부했다. 노동법 전문가 김지형 전 대법관이 조정위원장을 맡았다. 김 전 대법관은 우리 사회에 조정과 화해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싶다며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난관의 연속이었다. 삼성·가대위·반올림 3자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김 전 대법관은 정강자 교수(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이어 백도명 교수(서울대 환경보건학)를 위원으로 선임했다. 백 교수는 삼성 백혈병을 규명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백 교수가 참여하면서 반올림도 조정위에 참여했다. 김 전 대법관과 위원들은 대법원 전원합의체보다 더 어려운 과정을 겪으며 조정안을 이끌어냈다. 역설적이게도 조정위원회 설립을 처음 제안한 가대위가 이 조정안에 반대했다. 삼성도 반대했다. 오히려 반올림이 찬성했다. 삼성 백혈병을 오랫동안 취재한 나는, 그때 그 순간이 가장 아쉬웠다. 3자가 ‘불만족의 만족’을 이뤘다면 이정표가 되었을 것이다. 삼성은 이후 ‘자체 보상’과 ‘자체 사과’를 했다. 반올림은 ‘사과’와 ‘보상’ 문제가 아직 남았다며 거리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삼성은 끝난 문제로 여기겠지만, 피해자가 있는 한 끝난 게 아니다. 강남역 8번 출구에 가면 한혜경씨가 있고,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주인공 황상기씨가 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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