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해양에서 발생한 대규모 적자와 분식회계, 경영진의 무능과 부패, 정경유착에 대한 보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하다. STX조선 같은 부실 대기업들에 막대한 구제금융 자금을 쏟아붓고도 회생시키는 데 실패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의 무능함, 그 배후인 청와대와 정부의 밀실 행정에 대해 여론의 질책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비판과 질책은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본 의문으로 이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당시 시작된 조선사와 해운사의 부실이 지금처럼 악화된 근본 원인은 그간 국책은행들이 제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라는 것이다. 국책은행들이 시장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를 따르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사업을 했다고 비판한다. 국책은행들의 잘못된 정책금융과 그 산물인 ‘좀비 기업’들이 한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며, 따라서 산업은행 등 정책 금융기관부터 손보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라는 지적도 나온다.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만이 아니다. 야권이 주최하는 정책 세미나들에서도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을 이참에 민영화하자는 발언이 전문가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국가가 국책은행들을 통해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상선 같은 대기업을 지원하니 대기업과 재벌 오너들 사이에 ‘대마불사’라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다는 것이다. 이들 국책은행에서 중소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기능만 남기고 나머지는 아예 시장 논리에 따라 민영화해버리자고 한다.

ⓒ연합뉴스강만수 전 기재부 장관(가운데)이 추진한 국책은행 민영화는 이권의 놀이터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야당이나 진보 정당의 경제정책에 조언을 하는 이른바 진보 경제학자들 대다수도 이구동성으로 국책은행 민영화에 찬성한다. 그리고 대기업 구조조정을 시장 원칙에 따라 수행할 가장 합당한 주체로 민간 사모펀드(PEF)들을 거론한다. 이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다면 ‘즉각적인 민영화 대 중장기적 민영화’ 정도다. ‘중장기적 민영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당장 닥친 그리고 앞으로 더 늘어날 부실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시중은행 채권단과 사모펀드 등이 자체적인 자유시장 메커니즘으로 감당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본다. 그래서 현행 국책은행 체제를 과도기적으로 유지하되 중장기적으로는 민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책은행의 민영화는 매우 어려운 과제다. 공상 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현실 경제 운영에서는 국책은행이 너무도 필수적인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민영화를 처음 검토한 것은 노무현 정부였다. 본격 추진한 것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명박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인 강만수씨는 2008년 임기 초반에 산업은행과 우리은행 등 정부 산하 은행들을 합병해서 ‘메가 뱅크’로 만든 뒤 민영화하겠다고 했다. 이른바 한국판 골드먼삭스 프로젝트다. 그런데 운이 나빴다. 하필 그 직후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 금융공황이 터졌고, 골드먼삭스 등 거대 투자은행들이 파산하거나 그 직전까지 가버렸다. 국내외 은행들의 수익률과 영업 전망이 추락하니 산업은행과 우리은행 역시 인수 주체를 찾을 수 없었다.

 

ⓒ연합뉴스6월8일 검찰이 경영 부실 은폐 의혹 등이 제기된 대우조선해양 본사를 압수수색하고 있다.

‘권한과 책임’ 없는 산업은행의 운명

이명박 정부 실세인 강만수 전 장관이 2011년에 산업은행 지주회사 회장으로 가면서, 산업은행 민영화에 다시 불이 붙었다. 이와 함께 이명박 대통령은 자원외교와 녹색성장 정책에 산업은행을 동원했다. 그 측근들은 산업은행과 자회사인 대우조선해양을 이용해 이권을 챙겼다. 산업은행의 임직원들 역시 민영화와 매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은행의 몸집을 키워야 했다. 그래서 관피아와 모피아, 권력 측근의 도움을 받아 무리하게라도 자산과 영업망을 확대하려고 했다. 공익적 정책 금융기관이 사익을 위한 시중은행으로 전환하는 준비 과정에서 수많은 사익이 다른 사익과 얽히면서 이권의 놀이터로 전락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도 초기에는 산업은행·기업은행·우리은행 등을 조속히 민영화하고 싶어 했다. 민영화론자인 홍기택 교수가 산업은행장으로 임명된 것도 그런 의도에서다. 하지만 세계 대불황은 회복될 기미가 없고, 더욱이 2014년부터는 중국·브라질 등 브릭스 경제의 추락과 함께 한국 경제 역시 대불황의 태풍 속에 본격적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건설업에 이어 조선 및 해운 업체들이 속속 부실화되었다. 그리고 이런 부실하지만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중요한 대기업들을 구제할 수 있는 주체는, 시장 논리에 충실한 민간 금융기관이 아니라 산업은행·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밖에 없었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여름,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의 민영화 중단을 선언했다. 마지못한 선택이었다. 산업은행이 관료들과 대통령 측근의 이권놀음에 휘말려 무능과 부패의 기관이 된 것은, 정확히 말해서 민영화 프로젝트가 계속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산업은행에 과거처럼 명확한 중장기적 산업정책 사명과 과제, 권한과 책임이 주어졌다면 최근 드러난 수준의 무능과 부패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조선업과 해운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정부에 큰 그림이 없다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조선업과 해운업 등의 ‘10년 대계’를 준비하는, 사명감 있는 국책은행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중장기적 산업정책 플랜도 사라지고 말았다.

여야 모두 책임이 크다. 여당에게는 서비스업과 이른바 창조경제 육성 이외에는 뚜렷한 산업정책이 없다. 조선과 해운, 철강과 화학 등 기존 주력 산업을 체계적으로 고도화하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야권 경제통들은 중소 벤처기업 육성과 R&D 지원을 제외한 일체의 산업 정책을 ‘박정희식 중상주의’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들이 주도해온 조선과 해운, 철강, 화학 등 기존 주력 산업들의 고도화에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향후 수만~수십만명 규모로 발생할 실직자들, 위기에 처한 서민경제와 지역경제, 한계상황에 직면한 주요 산업 등을 고려하면서 어떤 방식과 내용으로, 그리고 어떤 세력과 함께 구조조정 및 산업 고도화의 ‘큰 그림’을 그려나갈 것인가? 또한 이런 그림을 경제민주화 및 복지국가와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앞으로 우리 사회와 정치권이 깊숙이 논의해야 할 과제다.

기자명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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