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피트, 크리스천 베일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빅 쇼트〉란 영화가 있다. 헤지펀드 사이언캐피털 창립자인 마이클 버리 등 야심만만한 미국 금융업자들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전에 벌인 무모한 모험에 얽힌 실화다. 이들은 부동산 관련 금융상품들이 엄청난 호황을 누리던 2005년부터 이미 나름의 수학적 예측 모델에 따라 금융위기를 예견했다. 그래서 시장이 붕괴되면 엄청난 수익을 낼 수 있는 금융상품(‘쇼트’ 투자)을 설계해, 자신이 맡은 투자자들의 돈을 ‘올인’한다. 이후 버리 등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다. 금융시장이 오히려 호황을 구가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허무맹랑한 상품에 내 돈을 처박았다’며 항의하고 심지어 소송까지 예고했다. 그러나 2008년 가을 드디어 부동산 금융상품 시장이 폭발한다. 버리 등은 수백~수천% 수익률을 기록하며 떼돈을 번다.


결국 문제는 시장의 불확실성이다. 어떤 금융상품이나 기업의 가치가 앞으로 2~3년 뒤에 얼마나 오르거나 내릴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빅 쇼트〉의 경우에서처럼, ‘시장이 계속 호황을 누릴 것이다’라는 다수 의견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다. 시장의 각 주체들은 나름의 목표와 예측 모델을 기반으로 투자하고 그 결과에 책임질 뿐이다.
국책 금융기관인 산업은행이 지난해 말 자회사인 대우조선해양(이하 대우조선)에 4조2000억원을 지원한 것 역시 엄연한 투자 행위다. ‘산업은행이 돈을 다 날렸다’라는 말이 최근 횡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우조선은 반드시 망한다’라는 전제 위에서만 옳다. 시장의 미래를 누가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산업은행은 일종의 사모펀드(PEF) 기능을 담당해왔다. 사모펀드는 재무상태 불량 등으로 기업 가치(주식 가치)가 낮게 평가되어 있는 회사의 경영권을 사들이는 금융업이다. 인수한 뒤에는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인 뒤 되팔아 수익을 올린다. 성공할 때의 수익률은 대단히 높다. 망해서 한 푼의 금융수익도 낼 수 없을지 모를 극히 ‘불확실한’ 금융상품(기업도 일종의 금융상품이다)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고위험-고수익은 금융시장의 주요 법칙 중 하나다.


 

ⓒ연합뉴스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대우조선은 최근 몇 년 동안 재무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전 산업은행 회장 “산은은 정부 들러리였다”


다만 산업은행은 대다수 사모펀드들과 달리 ‘국유(국책) 금융기관’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산업은행의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다. 민간 사모펀드들의 목표는 오직 단기간에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것뿐이다. 대량 해고나 노조 탄압,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기업분할 및 매각 등도 꺼리지 않는다. 심지어 본사를 조세회피처 등 저세율 지역으로 이전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법인세를 적게 내는 기업이라야 비싸게 되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은행 같은 ‘국유(국책) 사모펀드’라면 어떨까? 수익률과 함께 고용, 국가경제 차원에서 해당 기업의 역할, 산업 고도화 등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국유 사모펀드의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고용 문제와 기업의 역할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에 구조조정과 매각이 늦어지고, 각종 이해관계자가 개입해서 ‘배를 산 위로 올려놓을 수 있다’.


산업은행이 대우조선을 인수한 것은 지난 2000년이다. 이후 대우조선의 실적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2001년 워크아웃을 졸업하자마자 LNG선 수주 부문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2005년에는 세계 최초로 LNG-RV(액화천연가스 운반선)를 건조했다. LNG-RV는, 배에서 육지로 직접 기화된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기술혁신으로 기존 LNG 해상 운반의 개념을 전복한 혁명적 제품이다. 2012년에는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연간 수주액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역시 세계 최초다. 이처럼 대우조선은, 한국이 2000년대 들어 세계 최고의 조선 국가로 성장하는 데 적잖이 기여했다. 사모펀드인 산업은행 처지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로 망한 회사를 인수해서 기업 가치 제고와 더불어 고용 창출, 산업 고도화 등 공공적 목표까지 성취한 업적이다.
이런 대우조선의 재무 상태가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히 악화된 원인은 세계적 경기불황이다. 국제무역이 대폭 줄어들었으니, 대우조선의 제품인 수송선 수요가 크게 줄어든 것은 극히 당연하다. 바다 한가운데서 석유를 캐내는 해양플랜트(2000년대 하반기 이후 대우조선의 주력 상품) 역시, 유가 하락으로 산유국 석유업체들의 재무 상태가 악화되면서 발주가 사실상 사라졌다. 조선산업은 경기변동에 유달리 예민한 부문이다. 세계 경기의 변동에 따라 수주 물량이 광란의 춤을 춘다.

ⓒ연합뉴스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최근 대우조선을 둘러싼 각종 정치세력과 경영자, 직원들의 ‘사익 챙기기’가 잇따라 보도되고 있다. 그럼에도 대우조선 등 조선 대기업들의 위기가 내부의 부정부패보다 외부 환경(세계적 불황)으로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한국의 조선업을 사양산업으로 단정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지난 5월25일 고려대에서 열린 〈위기의 한국 경제와 노동〉 심포지엄에서 조영철 전 국회예산정책처 사업평가국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조선업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전문가들은 한국의 조선업이 R&D 투자를 적극적으로 해 설계 및 엔지니어링 부문의 기술을 높이면 충분히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세계 조선시장이 조만간 회복되면 중국·일본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공급과잉이라면서 기업 구조조정을 통해 지나치게 숙련 인력을 정리하고 설비 규모를 축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상황들을 감안해보면, 지난해 말 대우조선에 대한 산업은행의 지원이 단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는지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이다. 시장논리로 볼 때 자금을 공급하면 안 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절실히 필요한 부문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 국책은행의 존재 이유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대우조선 등 조선 3사의 재무 상태가 악화되자 민간 은행들은 앞다퉈 대출금을 찾아갔다. 시장 논리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국책 금융기관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오히려 자금 지원에 나섰다. 대다수 언론은 이를 국책 금융기관의 문제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장은 본성적으로 불확실하다. 한국 조선업의 종말이 100% 확실하진 않으며 국제시장 상황에 따라 반전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더욱이 조선 대기업들의 패망이 산업 연관효과와 고용 측면에서 국가경제 전반에 가할 엄청난 충격을 감안한다면, ‘비 올 때 우산을 빼앗지 않은’ 것은 오히려 국책 금융기관들의 강점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책 금융기관들의 대우조선 지원을 관대하게 본다고 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의사 결정 과정에 정치세력의 불순한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이다.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이 이 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대우조선 지원 방침이 결정된 지난해 10월 당시 산업은행 회장이었다. 지난 2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로 자리를 옮긴 홍 전 회장은 최근 중국 베이징에서 〈경향신문〉과 만나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지난해 10월 중순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당시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임종룡 금융위원장, 진응섭 금융감독원장 등으로부터 정부의 결정 내용을 전달받았다.” 심지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얼마씩 지원금을 부담해야 하는지도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우조선 지원은 “청와대·기획재정부·금융당국이 결정한 행위로, 애초부터 시장 원리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으며 산업은행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라는 것이다.

ⓒ연합뉴스유희상 감사원 산업금융 감사국장이 6월15일 국책은행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시장의 냉엄한 판결에 따라 망하게 둬야 할 회사를 억지로 살려냈다는 의미일까? 그 궁극적 취지에 상관없이 청와대와 정부 측이 산업은행 수장을 윽박질러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지원토록 했다는 것은 큰 스캔들이다. 이 인터뷰를 계기로 정부-산업은행-대우조선 간의 커넥션을 통해 ‘공공기관의 본질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예컨대 공기업은 시장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직접 노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감시·견제 기능을 상실한다. 공기업을 움직이는 공무원과 정치인들은 위로는 권력자, 밑으로는 시민(과 이해집단)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행동한다. 이 과정에서 망할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식으로 자원 배분이 왜곡된다.


윤창중도 한때 ‘대우조선 사외이사’


실제로 감사원과 검찰, 언론 등이 밝혀낸 사실에 따르면 산업은행과 대우조선은 흡사 ‘공공기관의 비효율성’을 입증하기 위한 표본처럼 보인다. 정부는 산업은행을 100% 소유하고, 산업은행은 대우조선 지분 49.7%를 가진 ‘절대적 대주주’이다. 대우조선 정관에 따르면,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뽑고, 이 이사들이 다시 사장·부사장 등의 대표이사를 선임한다. 대주주인 국가(정부와 산은)의 의지에 따라 대우조선의 경영진이 결정되는 것이다. 더욱이 경영진을 견제하는 사외이사마저 이사회 내에서 만든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임된다. 이런 이사진 가운데 일부가 다시 감사위원회를 구성한다. 이른바 ‘셀프 견제’와 ‘셀프 감사’ 시스템이다.


지난 3월 말 현재, 대우조선의 사외이사 4명 가운데 2명은 조전혁 전 새누리당 의원과 친박계 유정복 인천시장의 보좌관 출신인 이영배씨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도 한때 대우조선 사외이사였다. 최근 JTBC는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대우조선의 비상근 임원 67명의 명단을 입수해 보도했다. 이들은 특별한 직무도 없는 ‘고문’ 직함을 달고 수백만원의 월급 이외에도 의료비·학자금·고급 차량까지 제공받았다. 남상태 전 사장 등 대우조선 퇴직자들은 물론 조선사 업무에 무지한 군 장성과 국정원 출신, 심지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진을 촬영해 ‘대통령 사진가’로 알려진 인사까지 고문 직함을 달았다. 정치세력의 기업 약탈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영향력 및 사익 챙기기가 산업은행의 절대적 지분을 타고 대우조선으로 스며들어, 힘 있는 자들만의 폐쇄적 공간을 형성한 것이다.


산업은행은 자회사이자 금융자산인 대우조선을 제대로 감독·관리하지 못했다. 감사원의 6월15일 발표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대우조선에서 2013~2014년에 저질러진 1조5000억원 규모의 분식회계를 사실상 묵인했다. 분식회계 규모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대우조선의 한 직원은 지난 8년 동안 무려 180억원 규모의 횡령을 저질렀다. 이 사실은 산은이나 대우조선 차원의 감사가 아니라 다른 직원의 제보로 적발되었다.


홍기택 산업은행 전 회장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회계 부실을 감지할 수 없었던’ 이유로 “대우조선 사장은 산업은행보다 더 큰 (정치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산업은행 회장에게 연봉 3억~5억원과 사실상 장관급의 의전을 제공하는 이유는 정치권에 들러리 노릇을 하지 말고 상대적 독립을 유지하라는 취지다. 홍 전 회장은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의 ‘경제 교사’로서 시장주의 민영화론자였다. 정작 그 자신도 ‘낙하산’으로 불렸다. ‘낙하산’들이 얼마나 자신의 공적 직무에 태만하고 현실적 이익엔 민감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산업은행 회장이) 이렇게까지 나쁜 자리인지 몰랐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봤듯이, 현재의 국책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조정 시스템에는 장단점이 있다. 국책 금융기관은 산업정책적·사회경제적 측면에 민감하지만 정치권의 약탈과 특혜·부패의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대안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국책은행을 청산하거나 민영화해서 민간 금융기관들에게 대우조선 같은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을 맡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국책 금융기관 시스템이 외부의 감시와 견제에 노출될 수 있도록 투명한 지배구조를 새로 짜는 것이다. 앞으로 조선·해운을 벗어난 광범위한 구조조정이 전개될 상황에서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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