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입고 싶은데 결혼이나 할까.” 설빔으로 알록달록한 때때옷을 받았던 시절 이래로 한복 입을 일이 없었다. 다채로운 색감에 홀려 부모님께 사달라고 졸라봐도 “그걸 어디서 입을 건데?” 하시면 “…그러게”라고 대답하곤 했다. 어른 되면 사 입어야지 해도, 학교 선생님들이 입고 오는 생활한복은 누가 봐도 ‘도덕’ ‘역사’ 교사 같았다. 잔뜩 튀어나온 배를 가려주어 입는 이의 체형을 보완해주는 기능만은 잘 알겠으나, ‘한복의 미학’과는 상당히 멀었다.

한복을 입어본 지 20여 년은 흘러 그런 옷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가물가물해질 무렵, 감각을 후려치는 화보가 세상에 나왔다. 배우 이영애의 〈마리끌레르〉 한복 화보였다. 사진은 ‘이것이 한복이다’라는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고, 각종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은은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에 반한 친구들은 너도 나도 결혼하면 한복을 맞추겠다고 나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한 선배들이 그러는데, 한복은 입을 일 없어서 돈 아깝대. 나는 빌려 입으려고”라며 실속 있는 새색시가 될 것처럼 굴더니 태세 전환은 신속했다. 흐름에 묻어가고 싶었다. 덩달아 맞춤 한복의 세계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눈 딱 감고 한 벌 지른다고 한들 시댁도 없는 내가 대체 이 옷을 어디서 입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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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럽던 비혼자의 삶이 한복 때문에 덜 만족스러워진 분들, 나 말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진정하자. 약간의 시간과 비용만 들이면 웨딩 촬영 뺨치는 한복 사진을 얻어낼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한복 체험이 궁중 복식을 입고 변 사또가 된다거나 독립투사로 분해 유관순 열사가 되어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복을 ‘자기 취향대로’ 제대로 입어볼 수 있다. 종종 땋은 머리에 깜찍한 배씨(서너 살 된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 꾸미개) 댕기를 얹거나, 쪽 진 머리에 꽃비녀를 꽂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연출해볼 기회는 알고 보면 무궁무진하다.

먼저 한복 대여 후 궁궐 방문을 추천한다. 목적은 웨딩 사진 뺨치는 결과물을 얻어내는 데에 있다. 궁궐은 꼭 필요한 공간이다. 마침 서울의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은 한복 입은 관람객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한복을 입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궁궐 나들이 가는 게 아찔할 수 있다. 꽃신을 신고 걷는 건 생각만 해도 발이 아프다.

이들을 위해 궁궐 주변 지역인 서울 북촌과 인사동, 종로와 을지로에는 한복 대여를 겸하는 공방과 업체가 여럿 있다. 한복·머리장식·꽃신·손가방 등을 다양하게 갖춰놓았으므로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방문객들은 비슷한 색깔로 팀 컬러를 맞추거나 의상 콘셉트로 역할을 나누는 등 여러 조합을 뽐낸다. 한복의 색감은 끝없이 다채로우니 자신의 감각을 발휘해 예쁘게 입기만 하면 된다. 너무 많은 색깔 때문에 결정 장애가 올 때는 직원에게 부탁하자. 내 얼굴빛을 화사하게 살려줄 색감을 전문가의 안목으로 골라준다.

궁궐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한복 색깔과 고궁의 담벼락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원래 거기 살았던 사람처럼 예뻐 보인다. 서울 4대 궁궐 중 외국인이 가장 많은 곳은 경복궁이다. 함께 사진 찍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 하루쯤 모델이 되어보고 싶은 이에게는 추천한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미를 알리기보다는 ‘이 사진이 어느 나라 인터넷에 떠다니게 될지’ 염려되는 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외국인 관람객이 적은 창덕궁을 권한다. 특히 창덕궁 비원(특별관람비 5000원)은 관람 인원이 제한되어 한적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문화재청의 웨딩 촬영이 허가되지 않은 곳이므로, 친구의 웨딩 사진에는 없는 배경으로 나만의 인생 샷을 건질 수 있는 건 덤이다.

사진 찍고 커피 마시기 좋은 ‘한복 테마 카페’

사설 업체의 한복 대여 비용이 부담된다면 운현궁, 남산골 한옥마을, 북촌 한옥 체험살이 안내센터, 인사동 홍보관, 서울 글로벌 문화체험센터 등에 들러보자. 한복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업체를 돌아다니는 것이 귀찮거나 사진만 남기길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1만원 미만으로 한복을 입어볼 수 있다. 또한 궁궐에서의 한복 체험을 통해 한복을 혼자서도 입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면 동네 한복집에 전화를 돌려보는 것도 좋겠다. 생활한복부터 전통한복까지 대여를 겸하는 곳이 생각보다 꽤 많다.

밖을 걷는 것은 싫지만 멋스러운 한복 사진을 남기고 싶은 이들에게는 ‘한복 테마 카페’를 추천한다. 궁중한복, 혼례용 한복, 기생복 등 다양한 종류의 한복을 빌려 입고 카페에 마련된 여러 스튜디오에서 일정 시간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한 시간 정도 사진을 찍으며 놀다 보면 체력 소모가 꽤 큰데, 커피 한잔 마시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 있는 것도 카페의 장점이다. 전문적인 사진을 원한다면 비용을 더 지불하고 사진작가에게 요청할 수도 있다. 인사동·동대문·명동 등에 위치해 있고, 소셜 커머스를 이용하면 좀 더 저렴하게 구입 가능하다.

한복을 입어보고 나면 그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생긴다. 왠지 기성복이 볼품없어 보이고, 어떤 옷을 봐도 한복만 하지 않다. 기성복은 한복 특유의 신선하고 화사한 색감을 낼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덧붙여 지난 사진을 보며 한복이 몸매까지 보완해줬다는 사실을 몸서리치게 느낄 때 ‘한복앓이’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생활한복 업체를 들락거리고, 그것으로 못내 아쉬워 이왕이면 본인에게 좀 더 맞는 색깔과 재질을 찾아 헤매다 보면 어느새 한복 동호회에 가입해 한복 디자인을 배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동호회에서는 취미로 한복을 제작하는 이들과 전문적으로 한복 디자이너를 준비하는 이들이 어우러진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비영리단체인 ‘한복놀이단’과 네이버 카페 ‘한복 입기 좋은 날’은 그 대표적 공간이다. 모임을 통해 한복 만들어 입기 등을 하면서 한복은 관리하기 어려운 고가의 옷이라는 인식도 깨진다. 밟히지 않는 기장, 세탁하기 편한 원단 등을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한복을 입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회원도 있다. 생활한복뿐 아니라 동호회에서 강사를 초빙해 진행하는 전통한복 교육 과정을 충실히 밟아나가면 과정을 마칠 때쯤 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나만의 옷이 생기는 것이다.

한복은 특별한 날 입는 것으로 인식되고, 한복을 입은 무리가 지나가면 ‘무슨 행사 있나?’라고 여기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단체들은 한복을 입고 정기 모임·플래시몹 등을 진행하면서 대중에게 한복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한복을 한번 입어보고 싶지만 혼자 입기 쑥스럽다면 이 단체의 ‘번개 모임’에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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