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연인과 크게 다퉜다.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는 도로 한복판에서 뛰어내려버렸다. 〈곡성〉 때문이었다. 원래 무서운 영화를 힘들어한다. 2003년인가 시사회장에서 〈장화, 홍련〉을 보다가 까무러칠 뻔한 적이 있다. 그때 공포 영화도 가리지 않고 봐야 하는 영화 전문 기자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이번에도 〈곡성〉만은 가능하면 피해보려 애썼다. 일 때문에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곡성〉을 보는 내내 진저리가 쳐졌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씹듯이 내뱉었다. “쓰레기네.” 〈곡성〉이 쓰레기는 아니다. 인간은 두려우면 미워한다. 공포의 대상을 증오의 대상으로 치환해야 자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무심하게 대꾸한 게 화근이었다. “난 재미있던데?” 그 순간 〈곡성〉을 향했던 증오심이 그녀를 겨냥하고 말았다. “〈곡성〉이 재미있다는 네가 더 무섭다.” 곡소리가 시작됐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처음 뉴스를 통해 접했을 때였다. 직관적으로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범죄’라고 이해했다. 용의자 김 아무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전력이 있었다. 수개월 동안 약물치료를 받지 못해서 피해망상이 심해진 상태였다.

강남역에선 피해자에 대한 이례적인 추모 열기가 이어졌다. 피해 여성과 같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애도와 울분이 대부분이었다.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 쉬운 여성으로서 그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이 이해는 됐다. 그래도 강남역 살인사건의 본질은 정신질환자의 피해망상 범죄라고 생각했다. 그게 논리적이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일부 남성들이 강남역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지 말라”는 시위를 시작하면서부턴 솔직히 관심을 끊었다. 여성혐오니 남성혐오니 하는 한국 사회의 남녀 갈등은 인종 갈등이나 지역 갈등만큼이나 소모적이다. 본질적으로는 집단끼리의 정서적 충돌이라 감정이 논리를 대신하기 쉽다. 상대방이 싫다는 건 논리가 아니라 감정이다.

〈곡성〉 체험이 시각을 180° 바꿔놓았다. 그때 그녀는 말했다. “저건 영화일 뿐이야.” 머리로야 이해가 됐다. 이미 느껴버린 공포를 어쩌지 못했다. 공포를 몰라봐주는 그녀에게 실망했고 분노했다. “저건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우발 범죄일 뿐이야”라는 논리에 여성들이 남성과 사회에 실망하고 분노했던 이유가 그제야 납득이 됐다. 그 순간 필요한 건 이해가 아니라 공감이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를 봤다. 한 남성이 남성에게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여러 여성들 앞에서 고백하는 장면이 방송됐다. 남녀 사이에서 강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게 화면으로도 느껴졌다. 울컥했다. 머리로 이해하는 건 부족하다. 가슴으로 공감해야 화해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치유하지 못하는 까닭

권위주의 시대의 한국 사회는 갈등을 힘으로 해결했다. 강하고 다수인 쪽이 이겼다. 폭력의 시대였다. 민주화 시대의 한국 사회는 갈등을 논리와 설득으로 해결했다.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이성의 시대였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갈등은 이해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갈등의 내면엔 감정적 상흔이 있어서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공감 없는 논리는 흉터를 헤집는 차가운 흉기일 뿐이다. 한국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이제껏 치유하지 못하는 이유다. 강남역 살인사건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공감의 시대다.

그녀와 〈아가씨〉를 봤다. 아가씨와 하녀는 손을 잡고 저택을 탈출한다. 야트막한 담벼락이 둘을 가로막는다. 하녀는 훌쩍 뛰어넘는다. 아가씨는 못 넘는다. 다 큰 아가씨가 어린아이도 넘을 담장 앞에서 두려워하는 걸 ‘이해’하긴 어렵다. 하녀는 되돌아가더니 아가씨를 위해 짐가방으로 계단을 쌓아준다. 하녀는 그렇게 아가씨의 공포를 ‘공감’한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곡성〉 때 공감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기자명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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