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의 헌정 체제인 제6공화국을 탄생시킨 건 1987년에 일어난 6월 항쟁이었어. 아빠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야. 고달픈 고3 생활 속에서도 거의 모든 국민이 떨쳐 일어나 전두환 정권의 멱살을 거머쥐고 ‘독재 타도’를 외쳤던 그해 6월의 기억은 선명하구나. 부산 서면 거리에서 대학생 형들은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동요를 이렇게 바꿔 불렀지. “새 나라의 대통령은 대머리가 아닙니다.” 완강히 버티던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은 국민의 힘에 굴복했고 현행 헌법을 토대로 한 6공화국이 수립됐다.

이 위대한 6월 항쟁의 물꼬를 터서 폭포를 이루게 한 의인이 몇 명 있었어. 오늘 아빠는 그 의인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우선 박종철이라는 부산 출신 대학생. 1987년 1월16일 <중앙일보> 사회면에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死)’라는 2단짜리 작은 기사가 실렸어. 죽은 사람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이었지.

박종철의 친구들에 따르면 그는 더할 수 없을 만큼 착한 사람이었어. “따뜻한 점퍼를 입으면… 원래 소유자는 종철인데 학교 친구들이 보면 제가 입고 다니는 일이 더 많은… 친구들은 점퍼를 제 걸로 알지 종철이 것으로 알고 있지 않고 결국 제 것이 되는 그런 점퍼가 있었어요. 보통 사람이면 불만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종철이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시사IN 조남진 박종철 고문 치사가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 박종철 열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런 그에게 수배 중인 선배가 찾아왔고 박종철은 돈 1만원과 함께 누나가 짜준 목도리까지 건넸다고 해. 그 며칠 뒤 박종철은 이 선배를 추적하던 경찰들에게 연행돼. 박종철은 선배가 갈 만한 곳을 알고 있었으나 입을 다물었어. 경찰들은 이 어진 젊은이의 팔다리를 잡아채 물이 가득한 욕조로 끌고 간다. 얼마 후 기차게 착하고 순진했던 청년, 하지만 “우리 앞에는 외면할 수 없는 역사와 현실이 있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부르짖을 수 있었던 청년 박종철은 죽고 말았어. 경찰은 박종철이 어떤 ‘쇼크’로 죽었다고 우겼단다. 박종철의 죽음을 특종 보도한 기자는 이 희한한 사인(死因)에 특별히 따옴표를 쳐놨어. ‘쇼크사’라고. 따옴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 “쇼크사? 웃기고 있네.”

ⓒ연합뉴스 황적준 박사가 작성한 사인 감정서.

그런데 이 ‘쇼크사’가 세상에 알려진 데에도 한 평범한 의사의 결단이 필요했어. 물고문을 당하던 박종철이 의식을 잃자 경찰들은 인근의 중앙대학교 부속병원 응급실 의사를 불렀어. 달려온 이는 나이 서른한 살의 의사 오연상. 그는 가운이 젖을 만큼 물이 흥건한 취조실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감했어. 그때 그의 심경이 어땠을까. 어제만 해도 쾌활하게 생활하던 한 젊은이를 간단히 죽여버린 살인마들 틈에 끼어 그들의 주목을 받는 판국이었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자신도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거야. 실제 경찰은 다음 날 그의 진료실 문 앞을 교대로 지키며 외부인과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오연상 의사는 기자를 만났고 사건의 진실을 비춘다.

“청진기를 대보니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습니다.” 수포음이란 폐에 피나 기타 체액이 스며들어 나는 소리다. 사실은 물고문과 직접적 연관이 없어. 그러나 어떻게든 물고문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싶었던 의사가 그렇게 용기를 냈던 거야.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리라”고, 자신을 가다듬으면서.

박종철의 사인을 확실히 밝혀야 하는 곳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였어. 치안본부장 이하 경찰의 고위 간부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로 총출동했다. 심장 쇼크사로 하자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하자는 등 갖가지 사악한 시나리오들이 제시됐다. 심지어 치안본부장이 목욕이나 하라며 100만원 현금 다발을 담당자에게 건네기도 했어. 이 절체절명의 순간, 박종철의 사인을 밝히는 임무를 맡은 이는 황적준이라는 법의학자였단다.

“1억 줄게, 입 다물어” 협박을 목격하자…

그 역시 고민을 거듭한다. 눈 질끈 감고 ‘원래 폐에 병이 있었으며 사인은 그것’이라고 써놓고 서명 한번 해버리면, 상황이 정리될 수 있었어. 부검이 끝나면 곧바로 시신을 화장터로 옮기도록 만반의 태세가 갖춰져 있었으니, 다른 의사가 시신을 볼 틈도 없었지. 하지만 황적준 박사는 깊이 잠든 자기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역사적 결단을 하게 돼. “정의의 편에 서서 감정서를 작성하겠다.” 대한민국 역사는 이 결연한 의사의 증언으로 서서히 태풍권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물고문으로 한 대학생을 죽여버렸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거야.

ⓒ박종철 기념관 1987년 1월26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 100여 명이 박종철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박종철의 슬픈 죽음이 용기 있는 의사들의 폭로를 통해 국민의 가슴을 울리는 종소리로 변해갈 즈음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린 전두환 정부는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어. 박종철의 죽음에 관계된 경찰관들이 더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건을 축소 조작해서 경찰관 두 명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던 거야. 그런데 이런 상황을 낱낱이 지켜보던 한 교도관이 있었다. 서울영등포구치소 보안계장 안유였어. “당시 경찰 수뇌부들이 구속된 경찰들을 찾아와 입 닥치고 있으면 1억원을 주겠다고 회유하고 가족을 내세워 협박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의 눈앞에서 경찰들이 무슨 영화 속 조직폭력배들처럼 “1억 줄게, 입 다물어” 따위의 대사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교도관들을 ‘우리 식구’로 믿었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런데 교도관은 너무도 억울하게 죽어간 대학생의 죽음 앞에서 그야말로 영웅적으로 경찰의 믿음을 배신해. 이 사실을 구치소에 갇혀 있던 재야 인사에게 털어놓은 거야.

자신이 감시하는 수용자에게 자신이 속한 국가기관으로부터 얻은 비밀을 털어놓는 교도관을 상상해보자. 그 마음은 어땠을까? 만약 발각이라도 된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들이닥칠지 당연히 고민했을 거야. ‘교도소 침투 간첩단’의 일원으로 조작되어 대공분실에 끌려가 욕조에 머리 담근 채 버르적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그려보았을 거야. ‘가족들에게 해가 미치면 어쩌나’ 하고 이맛살도 찌푸렸을 거다. 그러나 안유 보안계장은 용기를 냈다. “이럴 수는 없어!”

안유는 양심의 소리에 화답했고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비밀을 누설함으로써 역사의 물꼬를 텄다. 그가 토로한 비밀은 또 다른 양심의 전달자들을 통해 외부로 누출됐어. 1987년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발표한 ‘고문 경찰 축소 조작’ 실태는, 안유 계장이 전한 내용 그대로였지. 생으로 한 젊은이를 죽여놓고 사인 및 범인들까지 축소 조작하려 했던 전두환 정부의 징그러운 알몸이 5월의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어. 그로부터 20일 뒤 6월 항쟁의 태양은 휴전선 이남 9만8000㎢의 남한 땅 전역을 벌겋게 달구게 돼.

여기서 한번 돌이켜보자. 6월 항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산맥을 솟게 만든 힘은 어느 걸출한 영웅이나 출중한 능력자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어. 오히려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앉은 아저씨일 수도 있고, 술 취해서 시끄럽게 노래 부르며 지나는 대학생 오빠일 수도 있고, 병원에서 우리더러 “아~ 해보세요” 하며 플래시를 켤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나왔지. 그들이 애면글면 고민하다가 주먹 쥐고 일어서서 내린 결단, 그들이 짜냈던 소박한 용기, “이럴 수는 없지 않아?” 하면서 내젓는 고개가 일으킨 바람이 모이고 쌓여 1987년 6월이 왔던 거란다. 아빠도 그리고 너도 그럴 수 있어. 그게 1987년 6월의 교훈인지도 모르지.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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