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 그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박경신 교수가 2014년에 쓴 칼럼에 이런 얘기가 있다. 독일 어느 도시에서 인종우월주의자들의 집회가 열리자 주민들이 집회 장소에 나가 등을 돌린 채 이들을 에워쌌다고 한다. 그리고 집회가 끝날 때까지 그들을 완벽하게 무시했다. 독일 언론도 기사화하지 않았다. “결국 주민·언론·경찰이 인종우월주의자들의 집회를 막는 대신 ‘무시의 장막’으로 대응해 인종우월주의자들의 집회 목적, 즉 메시지를 널리 알리겠다는 의도를 무산시켰다. (중략) 보도의 방법과 수위에 있어 혐오 표현자를 돕는 효과와 이를 고발하는 효과 사이에 저울질을 할 필요가 있다.”

지난 5월17일 새벽, 서울 강남역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생면부지의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마 다들 알 것이다. 이 사건은 그간 크고 작은 폭력에 일상적으로 공포를 느끼던 여자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됐다. 피해자를 추모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강남역 10번 출구로 모이기 시작했다. 정신과 전문의와 법학자 등 전문가들이 “이 사건은 여성혐오로 인한 범죄”라는 소견을 내놓았음에도 경찰과 다수의 언론은 사건의 원인을 ‘조현병’으로 돌리며 정신질환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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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언론의 이런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말 심각한 얘기는 지금부터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강남역 10번 출구의 인파가 날이 갈수록 늘어가자 ‘일베’를 중심으로 추모 메시지를 찢고 추모객들을 해치겠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여성혐오 범죄를 여성혐오 범죄라 부르는 지극히 당연한 행위에 매우 분개한 그들은 핑크 코끼리 탈, 마스크 등을 쓰고 현장에 나타나 추모를 방해했고, “세계 치안 1위”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 일간베스트저장소 노무현 외 일동” 따위의 짐짓 점잖은 척 야비한 문구로 피해자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포함해) 그곳의 모두를 조롱했으며, 슬픔과 분노에 잠긴 이들을 자극하려고 ‘옷깃만 스쳐도’ 바닥에 나뒹구는 할리우드 액션을 마다하지 않았다. 2014년 일베와 수컷닷컴 회원들이 광화문에서 단식 중이던 세월호 유족들에게 몰려와 자장면과 피자를 먹으며 ‘폭식투쟁’을 했던 것과 비슷한 패턴이다. 이들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을 위협한다. 이들에게는 혐오가 즐거운 오락이자 스포츠이고, 자신들의 혐오 행위에 세간의 관심이 쏠릴수록 그 혐오가 정당한 것인 양 착각하고 뿌듯해한다.

혐오 발언이 물리적인 폭력으로 발현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와중에 한국 언론은 이런 한심한 이들이 쏟아내는 혐오 발언을 마치 진지한 의견인 것처럼 취재하고 보도했다. 언론은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모든 종류의 의견에 귀를 열어야 하니까? 아니, 틀렸다. 여성,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빈곤층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식의 기계적 중립은 오히려 혐오에 힘을 실어준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발언을 자세히 보도하는 것은 그 혐오가 뉴스 소비자들에게 가치가 있는 하나의 의견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베가 광장으로 뛰어나와 혐오 행위를 전시하기 시작한 것, MBC 김세의 기자가 “인터넷에서 일베가 사실상 유일한 우파 주류 매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고도 당당한 것, 일베가 쏟아내는 언어폭력이 사제폭탄으로 테러를 시도하는 등의 구체적·물리적 폭력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부 야만적인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 언론도 ‘차별하고 혐오할 권리’를 지지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독일 어느 도시의 시민·경찰·언론이 그랬던 것처럼 수준 이하의 발언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무시하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변화와 새로운 차원의 논의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기자명 신윤영 (〈싱글즈〉 피처디렉터)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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