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한 젊은 노동자가 달려오는 전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그는 홀로 스크린도어를 고치고 있었다. 막 고등학교를 마친 노동자였다. 그의 숙련도를 고려할 때 ‘보호’받으며 노동을 했어야 함에도 그런 조치는 전혀 없었다. 그가 남긴 가방 안에는 그의 고단한 삶이 엿보인다. 언제 출동할지 몰라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기에 들고 다닌 컵라면. 그는 외주업체에서 근무한 지 7개월째이며 지난 2월에 실습교육을 마쳤다.

그의 죽음에서 바로 떠오른 것이 ‘현장실습’이었다. 우리는 이미 현장실습생들의 숱한 죽음을 접했다. 문제는 이 ‘노동’이 생명에 대한 보호, 즉 안전에 취약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이다. 아직 숙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철저한 보호조치가 필요한데도 그런 고려 없이 현장에 밀어넣는다. 사고가 나면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실습생의 탓으로 돌린다. 생존을 위해서 하는 노동이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일이 되기 십상이다. 생명을 담보로 한 생존이라니 그 생존은 과연 생존인 것인가?

그러므로 이 ‘선택’은 생존과 굶어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두 죽음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생명을 담보로 한 생존, 즉 언제나 죽음의 위험에 노출된 생존과 ‘굶어죽음’이라는 두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제도의 보호를 받으며 ‘필연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바깥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학생과 교육의 이름으로, 노동 보호에 대한 제도가 모호한 공백 지대에서 ‘우연히’ 살아 있는 셈이다.

‘필연적’으로 그는 외주업체 직원이었다. 노동의 맨 밑바닥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게 이들이지만 이들에 대한 법적 책임과 보호는 말 그대로 모호하다. 단지 그들의 신분이 비정규직 혹은 외주업체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노동하러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우연히 살아 있게 된다.

내 아버지는 덤프트럭과 레미콘 운전사였다. 아버지의 차 안에는 한 꼬마가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에 적힌 글이 ‘오늘도 무사히!’였다. 우리는 대를 이어 무사하기를 빌어야 한다.

ⓒ박해성 그림

그리고 일각의 주장에 따르면, 치안이 가장 잘 돼 있다는 한국에서 ‘우연히도’ 여성이 아무런 이유 없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죽었다. 이 죽음을 보며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운명이 그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집 밖에 나서는 순간, 혹은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이들은 우연히 살아 있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이 우연히 살아 있음에 대한 집단적 각성이 이들을 강남역 10번 출구로 모이게 했다. 일각에서는 우연한 사고에 과잉 대응한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들이 깨달은 우연은 그 사고가 아니라 자신들의 ‘집단적 운명’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와 구의역을 잇는 것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이 우연히 살아 있음을 목도한다. 세월호에서부터 메르스,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이 계보가 그려지고 있다. 이 국가와 사회가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와 그리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슬픔. 그것이 무고한 죽음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게 아닐까. 언제 내 차례가 올지 모르고 그 차례는 정확하게 약자들부터 시작된다는 것 말이다. 여성과 비정규직, 청소년·청년 노동자 그리고 장애인 등.

사고를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집단적 운명으로 자각한 사람들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집단적 자각에 의해 서로를 방문하고 위로하고 손을 맞잡으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을 ‘연대’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 지금 필요한 것은 ‘우연히 살아 있는 자들의 연대’다. 이 연대를 통해 우리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권활동가들과 지역민들의 활약으로 강정이 밀양으로, 밀양이 평택 쌍용자동차로 이어졌듯 강남역 10번 출구가 구의역으로, 구의역이 강남역으로 또 장애인이동권과 사회참여권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각자의 우연에 갇혀 필연적으로 죽게 될 것이다.

기자명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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