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던 열아홉 살 젊은 용역 직원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이어진다. 그의 가방 안에서 컵라면 한 개와 스테인리스 숟가락, 나무젓가락과 작업공구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마음을 더욱 아리게 한다. 가족들이 느낄 슬픔의 깊이를 헤아릴 길은 없다. 참혹한 비극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는 오히려 미안한 일이다.

이번 사고는 2013년 성수역과 2015년 강남역에서도 같은 사고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작업자의 과실이나 안전불감증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위험한 작업환경을 강요하는 구조적 문제가 근본 원인이다. 더구나 숨진 김군이 지난 5월23일 서울메트로 본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의 원인이 단순 사고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서울메트로에 자회사를 설립하는 대신 직접 고용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서울메트로는 김군이 근무했던 은성PSD 같은 하청업체와 계약할 때, 전체 고용인력 중 30%를 서울메트로의 전적자로 채우고 이들의 임금을 서울메트로 재직 시 급여의 60~80%를 보장한다는 합의서를 용역업체와 체결했다고 한다. 서울메트로가 ‘전관예우’를 위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퇴직자들을 우선 채용하도록 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 사고 후 서울메트로가 재발방지 대책이라고 발표한 것 가운데 하나가 정비를 맡을 자회사 설립이었으니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번 기회에 자회사 설립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것 같다. 안전과 관련된 중요한 업무에 종사하는 인력을 임시직으로 채용하는 것이 경영 합리화인가.

이번 사고는 인간은 없고 돈을 향한 경쟁만 난무하는 우리 사회가 빚은 비극이다. 정부는 모든 곳에서 경쟁과 효율성, 경비 절감을 강조하는데 이로 인해 사회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사회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경쟁만을 강조할 때 결국 모두 패배자가 되고 사회적 갈등과 분노는 폭발하게 되어 있다.

경쟁이 중심 가치이자 목표인 사회에서 경쟁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만 피폐해진다. 어린 학생들이 친구들보다 앞서는 교과 성적과 학생부 성적을 받기 위해 반복적 노동과 같은 학습으로 경쟁하고, 청년들은 취업 시험공부를 하며 몇 년씩 허비하는 현실에서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한 청년이 아파트에서 투신했는데 그 당시 아래를 지나가던 다른 공무원을 덮쳐 목숨을 잃게 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것도 마중 나온 만삭의 아내와 어린 아들의 눈앞에서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와 같은 사회적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원이 발표한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이 61개국 가운데 29위로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고 이것도 지난해보다 4계단 하락했다. 경쟁을 구호처럼 외치지만 이처럼 경쟁력이 하락하는 것은 구조적 원인에 의한 것이므로, 위의 수치는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비용 절감한다고 어디든 외주와 하청을 주는 나라

효율성과 경비 절감을 내세운다고 조직이 효율적으로 되거나 경비가 절감되는 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다른 수단으로 예산 빼돌리고 배 불리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공직 부패와 기업 부패 등 사회 전 부분에 걸쳐 점점 부패가 만연해지는 현실이 이를 반영한다.

안전 업무의 외주화 또한 이번 사고의 주요 원인이다. 시민의 생명과 관련된 대중교통 시설의 안전을 돈으로만 계산해 값싸게 조달하려는 발상을 한 모든 관계기관이 원인 제공자이자 사고 책임자이다. 외주화 문제는 지하철만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고용 형태에서 외주와 하청이 없는 곳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공항의 안전요원까지도 외주업체 직원인 상황에서 대통령은 19대 국회에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곧 테러가 발생할 것처럼 시급하다고 재촉했다.

여야 정치인들은 김군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앞다퉈 사고 현장을 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발걸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자본 중시와 인간 경시로 인한 사고가 원천적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입법 조치를 취하는 것이 먼저다. 이와 관련된 법안이 19대 국회에서 제출되었다고 하지만, 이번 20대 국회에서 통과시키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옛말은 더 이상 속담에 그치지 않는다. 소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기자명 박상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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