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엄마 손 붙잡고 장난감 가게를 지나칠 때면 언제나 엄마와 승강이를 벌였다. 엄마가 순순히 사줄 리 없지. 엄마는 나중에 네가 돈 벌면 네 돈으로 사라고 했고, 그때 그 아이는 나중에 커서 돈을 벌고 자기 돈으로 인형을 산다. “그 나이 먹고 무슨 인형이냐”라는 핀잔을 받아도, “어렸을 땐 내 돈으로 사라며?”라고 대꾸한다.

다 커서도 인형 사 모으는 취미를 가진 친구들끼리 서로를 ‘인덕(인형 덕후)’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른바 인덕들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사는 것, 꾸며주는 것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가지고 노는 것.

국내에서 소비되는 인형들은 매우 다양한데,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론인형’ 사이즈의 6분의 1 인형(일반적으로 육일인형, 육일돌이라고 부른다)과, 70㎝까지 크기가 다양하며 우레탄으로 만들어진 구관인형이다. 육일인형은 PVC 재질로 되어 있으며 크기가 작고 가볍다. 휴대가 용이하며 보관·관리가 간편하다. 대신 관절이 없거나 있어도 제한적이라 포즈를 자유롭게 취하기 힘든 편이다. 외형도 대부분 오밀조밀 귀엽고 아기자기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반면 구관인형은 관절이 있어서 육일인형에 비해 포즈가 자연스럽고, 안구나 가발 등을 바꿔줄 수 있어서 외형을 연출하기가 자유롭다. 대신 우레탄 소재에다 크기가 크기 때문에 무게가 무겁고 변색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예전에는 대부분이 ‘구관 오너(인형을 구매하여 가지고 있는 주인을 오너라고 부른다)’였는데, 최근 다양한 국내 육일인형이 나오면서 ‘육일인형 오너’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육일인형만을 위한 행사도 따로 개최되고 있다.

ⓒEPA2009년 3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탄생 50주년 기념 전시회에 전시된 바비 인형들.

일반적으로 마트에서 접할 수 있는 바비와 미미, 쥬쥬 외에 일본의 블라이스와 리카, 미국의 패션로열티, 포피파커 등과 같은 패션돌, 국내 자작인형 등은 육일인형의 범주에 속한다. 특히 최근 국내의 아티스트들이 직접 만든 육일인형을 출시하면서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육일인형들이 매우 다양해지고 풍성해졌다.

‘아토마루’의 인형은 20㎝ 정도 되는 크기에 균형 잡힌 이목구비와 소녀 같은 생김새가 돋보인다. ‘이브리’의 자작인형 쿠쿠와 클라라는 사랑스럽고 독특한 분위기를, ‘쪼로리아트’의 자작인형 꽃지는 가느다란 몸매와 빈티지한 페인팅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1년에 2~3회 특정 콘셉트를 가지고 출시되며, 온라인 홈페이지나 ‘돌프리마켓’ ‘육일전’ 등 플리마켓에서 판매된다. ‘아토마루’의 인형과 ‘이브리’의 인형은 각각 코스메틱 브랜드 베네피트, 메이크업포에버와 콜라보레이션하여 ‘베네갤 아람(아토마루×베네피트)’, ‘클라라 드샴므(이브리×메이크업포에버)’를 출시해, 이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명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밤새 줄을 서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다.

국내 자작 육일인형들이 대부분 크기가 작고 아기자기하며 귀여운 생김새로 소녀 같은 분위기인 것과 대조적으로 해외의 육일인형들은 길쭉길쭉하고 스타일이 좋은 편이다. 일본의 모모코, 유노아 같은 인형들은 인체와 거의 흡사한 8등신 비율이라 사진을 찍으면 패션 화보 같은 느낌이 난다. 인티그레이트(Integrate) 사의 포피파커나 패션로열티 역시 유사한 계열로, 서양의 슈퍼모델처럼 섹시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형들을 주로 내놓는다. 바비를 만든 마텔(Matel) 사에서도 다양한 라인으로 육일인형을 출시하는데, 우리가 주로 접하는 바비는 ‘핑크 라벨’로 보급형이고, 컬렉터들을 위한 블랙 라벨 바비, 실크스톤 바비 등 고급화된 콘셉트의 인형들도 있다.

이것들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조금 더 독특한 콘셉트를 원한다면 마텔 사의 ‘몬스터 하이’ 인형을 추천한다.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등 괴물들의 딸·아들이라는 콘셉트로 출시된 이 인형들은 독특한 피부색과 생김새로 기괴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개당 2만~3만원 선으로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더 무서운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리빙데드 돌’이라는 인형도 있다. 이 인형은 ‘이미 죽어 있다’는 뜻으로, 각각의 인형이 왜 죽었는지 사망진단서가 들어 있다. 사인에 맞추어 상처, 피 등이 페인팅되어 있고 관 모양의 박스에 들어 있어서 마치 호러 영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세상에 다시없는 나만의 인형

이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인형을 찾지 못했다면 다음 방법은 커스텀(재가공)이다. 공장에서 나올 때 그려져 있는 페인팅을 지우고 새로 얼굴을 그려넣거나, 기존의 머리카락을 제거하고 다른 인조모를 심어 헤어스타일과 머리카락의 색을 바꿀 수 있다. 고무 재질로 되어 있는 인형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커스텀이 가능하다. 이렇게 변신한 인형들을 OOAK(One of a Kind)라고 부르는데, 세상에 다시없는 나만의 인형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매력도가 배가된다. 국내 자작인형인 ‘아토마루’에서는 아예 눈, 코, 입이 그려져 있지 않은 ‘사랑이 필요한 도란도란 인형’을 출시하여 소비자가 직접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그릴 수 있다. 만약 손재주가 없거나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커스텀 의뢰를 맡길 수 있다. 관련 카페에서 솜씨 좋은 사람들이 상시로 리페인팅과 커스텀 의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분위기, 생김새를 사진과 말로 잘 설명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어느 정도 원하는 인형을 손에 넣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가지고 놀 시간이다. 내 인형을 예쁘게 세팅해놓고 나면 이것을 내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쉬워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이나 인터넷 카페 사이트에 올리게 된다. 종종 더 예쁜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에 카메라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거나 배경지나 룸박스를 구매하기도 한다. 룸박스는 하나의 방을 미니어처로 꾸민 것으로 인형을 위한 스튜디오라고 볼 수 있다.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면 비슷한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 서로의 인형을 구경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민망하게 바깥에서 어떻게 그런 것들을 잔뜩 꺼내두느냐고? 걱정 마시길. 서울 곳곳에 인형놀이를 할 수 있는 카페가 숨어 있다. 주로 이런 카페에서는 인형, 인형 옷과 물품들을 위탁판매도 하고 사진 찍기 좋게 배경도 구비되어 있기 마련이다.

가지고 있는 인형에 질렸거나 인형 놀이에 마음이 떠났을 때 집에 남아 있을 인형들이 처치 곤란이라면 어떻게 할까. 인형 놀이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중고로 되팔기가 손쉽다는 것이다. 비록 인형이 고가여도, 어느 정도 처음 들였던 금액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가격이 그렇게 부담스럽지만은 않다. 원금 회수가 가능하다는 게 아마도 이 취미의 막강한 장점일 것이다.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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