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추모가 아니라 죽음의 정치적 이용이다.” 서울 강남대로 노래방 화장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해석하는 프레임으로 ‘여성혐오’가 호출되는 게 불편한 몇몇 이들은 지난 며칠 내내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여성들이 날 무시했기에 아무 여성이나 죽이고 싶었다”라는 범인의 말은 광인의 말이라 신빙성이 없고,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것이 아닌데 왜 이 비극을 순수하게 추모하지 않고 양성 대결로 몰고 가느냐, 이건 고인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외침이 인터넷 곳곳에서 창궐했다. 자신들이 진보적 커뮤니티라 자부하던 곳에서부터 모욕을 통한 인정투쟁을 일삼던 극우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이 불편한 이들은 ‘순수한 추모’라는 깃발 아래 대동단결했다.

상대적으로 그 등장 비율은 낮지만 ‘순수한 추모’라는 말은 반대편에서도 간간이 새어 나왔다. 사회운동단체에서 추모집회를 열려고 했을 때나 기성 정치인이 추모의 뜻을 밝히고자 했을 때, 심지어 지난 29년간 여성 인권의 가장 견결한 수호자였던 한국여성민우회가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행사를 열 때조차 “여성 증오범죄에 대한 우리의 분노에 무임승차하는 자들”이란 비난이 등장했다. 이 사건이 “정신장애인들을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라는 인권침해적 주장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나, 사회안전망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을 꺼낸 이들도 “물타기하지 마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사건이 지닌 다양한 측면을 면밀히 검토하자는 주장들은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을 훼손하기 위해 동원된 물타기”로 오독됐다.

그 어떤 사건도 진공 속에서 발생하지 않고,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구성원들의 시각은 저마다 다른 위치와 상황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모든 사건은 태생적으로 다양한 정치적 해석의 가능성을 지닌다. ‘순수한 추모’라는 것은 유니콘처럼 애초에 없었던 존재인 셈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발생 빈도와 그 양상이 현저히 다르기에 ‘순수한 추모’를 다른 식으로 주장하는 두 경우를 등가 비교하며 양비론으로 몰고 가는 것만큼 비겁한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순수한 해석’을 강요당했던 쪽에서조차 ‘순수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등장하는 광경은 다소 서글프다. ‘순수함’에 대한 추구는 언제나 권력을 쥔 쪽의 승리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건을 해석할 권리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은 권력의 오랜 속성이다. “여성 우월주의자들”이라는 식의 낙인찍기로 메신저를 공격해 메시지가 순수하지 않다고 호도하는 이들은 사건의 해석을 독점해 자신에게 돌아올 비판을 줄이려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를 빌미로 정권 퇴진을 외쳐 사회 전복을 꾀하는 반정부 세력”이라는 식의 낙인찍기, “이것은 항해 중 터진 불행한 교통사고이지, 왜 이것이 정부와 청와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느냐”라며 해석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리스크 관리까지.

“나이키 신고 어찌 미 제국주의 반대 투쟁을 할 수 있나”

운동이 지리멸렬해지는 과정 또한 이 ‘순수성’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미 제국주의 반대 투쟁을 하는데 어떻게 나이키를 신을 수 있느냐는 오래된 운동권 전설에서부터, 순수성을 의심받을 수 있으니 집회 현장에선 너네 단체 깃발 내리라는 윽박지름, 저 사람은 우리와는 달리 태극기를 불태우다가 잡힌 거니까 경찰이 폭력시위로 몰아가기 위해 꽂아둔 프락치일지 모른다는 넘겨짚음.

‘순수한 의도와 단일한 목소리’를 요구하는 권력의 프레임에 넘어가는 순간, 운동이 그 동력을 잃는 광경을 우린 너무 자주 보지 않았나. “나와 뜻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득한 사회란 연대의 가능성이 질식한 사회이고, 연대의 가능성이 질식한 사회에선 결국 연대가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자가 이긴다. 어쩌면 우린 저항의 논리조차 압제자가 심어 놓은 논리 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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