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2008 세계철학대회가 7월30일 서울대에서 개막했다. 동서양을 막론한 104개국에서 3000여 명이 참가했다. 위는 개막식.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Rethin king Philosophy Today)”. 7월30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22차 세계철학대회의 주제다. 피터 켐프 국제철학연맹 회장은 이 주제의 의미를 “우리가 한국에 왜 모였는가와 직결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도 나름의 철학이 있다. 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명현 대회준비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개회 당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동양철학을 세계 무대에 올리는 중요한 일을 서울에서 하게 되었다”라고 자축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대회는 5년에 한 번씩 각국을 돌며 열리는 ‘학문 올림픽’이다. 역사도 100년이나 된다. 아시아 최초로 세계 철학대회를 개최하게 된 점은 한국이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그동안 철학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서양철학을 의미했다. 동양철학은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서양 대학에서 동양의 대표 사상인 유·불·선을 배우려면 철학과가 아닌 종교학과에 가야 하는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동서양에서 모인 참가자들은 이번 대회를 통해 “동양철학이 세계철학 무대에 정식으로 등단했다”라고 입을 모았다. 세계철학대회에서 처음으로 동양철학에 관한 정식 분과가 설립됐고, 첫 공식 일정으로는 한국 철학을 주제로 한 특별 심포지엄이 열렸다. 참가자도 한·중·일을 비롯해 러시아·인도 등 아시아 지역에서 온 학자가 30%에 이른다. 이삼열 한국 철학회장은 “이번 대회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전세계인의 반성과 사고가 종합되어 철학의 정체성이 풍부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철학, 일회성 프로그램에 그쳐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번 대회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동양철학이 대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을 뿐 아니라 이를 반영하는 방식도 일회성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2008 세계철학대회도 서양 국가에서 개최되던 기존 대회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프로그램은 여전히 서양철학 일색이다. “동양철학에 대한 분과를 하나 만든 것이 이번 대회에서 변화된 전부”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시사IN 한향란2008 세계철학대회가 7월30일 서울대에서 개막했다. 동서양을 막론한 104개국에서 3000여 명이 참가했다. 위는 토론회 장면.
이를 두고는 아직도 동양을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보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이어진다. 여전히 ‘철학은 서양철학’이라는 전제 아래 ‘동양철학은 이색적인 사상의 하나’로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터 켐프 회장은 “그리스에서 기원한 서양철학을 공부한 처지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동양철학의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에서 무엇을 이끌어낼지 개진할 때 오리엔탈리즘을 불식시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주최국 위상에 걸맞지 않게 한국 철학에 대한 논의가 대회에서 거의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 철학에 관한 프로그램은 한국 철학 관련 특별 심포지엄과 유영모·함석헌 사상에 대한 세션이 전부다. 이러한 일회성 프로그램만으로는 5년 뒤 세계철학대회에서 다시 한국 철학이 자취를 감출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장소를 제공하고 후원금을 대준 것 이외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세계철학대회를 서울에서 유치하고도 한국 철학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참가자들은 ‘콘텐츠 부족’을 꼽았다. 이기상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철학과)는 “공자·노자·장자가 가르치던 내용은 철학이 아닌 지식일 뿐이다. 현재 살아가는 것에 대한 해석이 없다”라고 꼬집었다. 이삼열 한국 철학회장도 기자회견에서 “한국 철학계는 이번 대회를 계기로 남의 철학을 외워 가르치느라 우리 철학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명현 의장은 이런 비판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 역사가 겨우 50여 년이라는 우리 현실을 인정하자면서 “한국적인 것만 고집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의 관점에서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에서 연초에 발간된 〈이코노미스트 2008 세계대전망〉은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철학대회를 주목하라고 주문했다. 한국인이 철학의 중요성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2008 세계철학대회는 현대 철학에 대한 반성, 동서양 철학의 화합, 한국 철학 연구의 시작 등에 수많은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동시에 작게나마 ‘결실’을 기대했던 참가자에게는 아쉬움을 많이 남긴 행사였다.

기자명 박근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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