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익(편집위원.환경재단 도요새 주간)지구 온난화 문제는 도덕적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생산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정치인과 기업가에게 환경적 도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결국 기대할 것은 도덕적 소비뿐이다.
며칠 전 통계청 자료를 들척이다가 세계 78개 나라의 이산화탄소(CO₂) 배출량 비교표를 발견하곤 흥미를 느껴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 표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과들을 보여주었다. 2004년 현재 미국이 58억t으로 압도적 1위, 만만찮은 속도로 미국 경제를 추격하는 중국이 47억t으로 2위를 차지했다. 이 표에 따르면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대략 238억t인데 이들 두 나라의 배출량을 합하면 45%에 이른다.

덧셈과 나눗셈을 계속해본다. 3위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이 55억t으로 23%를 웃돈다. 여기에 일본(4위), 인도(5위), 한국(9위)까지 합치면 이산화탄소의 80%를 이들 ‘문명국’이 뿜어내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8억4000만t),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8억300만t)의 배출량은 기껏해야 6위 독일(8억4000만t) 한 나라 수준이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CO₂ 배출한 결과물

그런데 문득 이 통계 수치는 믿을 만한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계산하는 것인지, 이런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이 방면에 해박한 후배에게 물었다. 그는 내 집의 가재도구 중에서 나무 책상이 있는지 묻더니,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책상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내 집까지 배달되었는지 그 과정을 상상해보라고 말했다.

먼저 인도네시아 어느 밀림에서 전기톱으로 나무를 벤다. 전기톱을 돌리려면 석유가 필요하다. 자른 나무를 항구까지 운송하려면 역시 석유가 들어간다. 인도네시아를 출발한 화물선이 인천이나 부산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엄청난 양의 기름이 소요될 것은 말하나 마나다. 나무를 하역하여 트럭으로 공장까지 실어 나른다. 공장에서는 나무를 켜서 책상을 짠다. 만들어진 책상은 여러 유통 단계를 거쳐 내 집에 트럭으로 배달된다. 이러한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 투입되는 에너지 총량을 이산화탄소 배출량으로 환산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 이를테면 자동차, 컴퓨터, 휴대전화, 주방용구,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또는 주택, 심지어 한 번 쓰고 버리는 휴지나 종이컵까지도 그것이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 결과물인지 계산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는 생산과 소비의 사이클에서 발생한다. 이산화탄소는 자연 상태에서도 발생하지만 그것은 지구환경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고마운 존재이다. 문제는 기계 문명 시대의 생산과 소비가 전적으로 석유와 석탄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소비의 천국’ 미국과 ‘세계의 공장’ 중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5%를 차지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지구는 태양이 보내주는 에너지의 일부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지구 밖으로 방출한다. 그래서 지구는 1만년 전의 마지막 빙하기 이후 지금까지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는 적당한 온도를 지켜왔다. 그런데 이산화탄소로 대표되는 온실 가스가 많아지면 밖으로 내보내야 할 에너지를 지구 안에 가둬놓게 된다. 지구는 오리털 파카를 잔뜩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상태가 된다. 그 결과를 예측한 시나리오는 다양하지만, 온난화가 인류와 지구 생태계의 멸망을 가져오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차이는 단지 그것이 2050년이냐, 2100년이냐, 그보다 훨씬 먼 미래의 일이냐 하는 속도에 대한 견해차가 있을 뿐이다.  

2007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앨 고어는 그의 책 〈불편한 진실〉에서 현재 인류를 위협하는 지구 온난화가 ‘과학적 문제나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문제’라고 썼다. 사실은 그래서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이다. 누가 미국인의 헤픈 소비를 억제할 수 있는가? 누가 중국에서 쏟아지는 공산품을 차단할 수 있는가? 오히려 미국의 소비 덕에 수출을 하고, 값싼 ‘메이드 인 차이나’ 덕에 생활의 편리를 누리고 있으니 그들 두 나라에 감사할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사실은 그래서 지구 온난화는 다시, 도덕적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생산의 주도권을 쥔 정치인과 기업가에게 환경적 도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결국 기대할 것은 도덕적 소비뿐이다. 그것이 우리 생활을 조금은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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