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이라 여겼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이 사태가 알려지자마자 전국에는 비상계엄령이 떨어졌지. 비상계엄이란, 전쟁이나 기타 비상사태를 맞아 군 병력이 경찰을 대신해 해당 지역의 치안을 장악하는 것을 말해. 계엄군 사령관이 행정권과 사법권을 틀어쥐게 되는 무시무시한 상황이야. 하지만 오래도록 민주주의를 염원해왔던 몇몇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계엄령을 해제하고 유신 체제로부터 벗어나 민주정치를 복원하고자 일단의 거사를 준비한다. 물론 계엄령하에서는 사람들의 모임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그들은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를 생각해냈어. 바로 결혼식이었지.

“신랑 홍성엽,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을 다음과 같이 거행하오니…”라는 청첩장을 만들었다. 청첩장엔 예식이 ‘1979년 11월24일 서울 명동 YMCA 강당에서 열린다’라는 문구가 주먹만하게 박혔다. 하지만 결혼식은 가짜였어. 신랑 홍성엽은 진짜였지만, 신부 ‘윤정민’은 애초에 그들의 꿈이었던 민주정치, 즉 민정(民政)을 비튼 가상의 인물일 뿐이었거든. 윤보선 전 대통령부터 젊은 학생과 노동자들까지 만장(滿場)한 가운데 결혼식이 열렸다. 예식에서 울려 퍼진 건 ‘딴딴따단~’ 결혼행진곡이 아니라 날카로운 구호와 비명, 뒤늦게 사실을 알아챈 계엄군의 군홧발 소리였지.

ⓒ연합뉴스 5월16일 유치원생들이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는 윤상원 열사 묘역을 지나고 있다.

체포된 사람들은 그야말로 악독한 고문을 받았다. 위장 신랑 홍성엽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만큼 특별 취급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백기완이라는 재야 인사였지. 이전부터 미운털이 박혀 있었던 그를 계엄 당국은 글자 그대로 짐승처럼 다뤘어. 체중 82㎏의 육중한 체구를 자랑했던 그가 40㎏대의 말라깽이가 될 정도였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니. 냉혹한 계엄 당국조차 이러다가는 죽이겠다 싶었던지 병보석으로 내보낼 정도였어. 그 참혹한 시간들을 백기완은 자신이 지은 시(詩)를 주문처럼 읊조리며 버텼다고 한다.

“시멘트 바닥에 누워 천장에 매달린 15촉 전구를 보고 있노라면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절망에 몸부림칠 때가 많았다. 극한상황에서 자꾸만 약해지는 정신을 달구질하기 위해 ‘묏비나리’ 시를 지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웠다.”

이 ‘묏비나리’라는 시는 출옥 후 요양 중에도 계속 백기완의 입에서 맴돌았고 결국 그의 손에 의해 쓰여 세상 밖으로 내보내졌다. ‘묏비나리’는 매우 긴 시다.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봐주기를 바란다. 한 건장한 사내를 반으로 쪼그라뜨리는 지옥불 같은 고문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고 부서지도록 이 악물면서 써 내려간 시이고, 그 시 속에서 가물거리는 희망을 찾았던 위대한 드라마의 대본이며 참혹한 역사의 증거이니까.

ⓒ시사IN 자료 <님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위)의 시 ‘묏비나리’에서 따왔다.

고문은 백기완의 육체를 파괴했지만 그 정신은 건드리지 못했어. 이후에도 백기완은 광주의 살인마이자 나라를 도둑질한 전두환 정권과 맞서 싸운다. 거동이 여의치 않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랄 만큼 심약한 유리 심장이 됐지만, 백기완은 각지를 누비면서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웠어. 그 와중인 1983년 2월 대구에서 열린 ‘기독교 예장(예수교 장로회) 청년 대회’에서 백기완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등장했을 때 청년들이 일제히 일어나 팔을 힘차게 뻗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 노래 가사는 백기완이 필사적으로 짓고 읊조리고 비명처럼 내질렀던 시 ‘묏비나리’의 일부였거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세상없는 명감독이라도 이런 명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백기완은 노래를 듣고 그냥 펑펑 울었다고 해. 봇물 터지는 울음 속에서 노래는 천사처럼 날개를 폈고 용기와 희망과 함께 어두운 역사의 허공을 날았지. 이게 바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야.

윤상원·박기순 영혼결혼식 기념해 만든 노래

이 노래가 지어진 시기는, 백기완이 노래와 마주하기 꼭 1년쯤 전이었다. 광주 항쟁의 마지막 날, 도청을 떠나지 않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다가 장렬하게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외신 기자들을 상대하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한때 은행 직원 노릇도 했던 그는 충분히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어. 그러나 시민군 지도자로 남아 끝까지 싸웠고 의연하게 죽었다. 밤 시간에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야학 활동을 했던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사망한 여자 동료가 있었지.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 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한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백기완의 시 일부를 따서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어. 노래의 주체는 윤상원과 박기순(윤상원의 여성 동료), 즉 ‘앞서간’ 이들이 살아 있는 자들을 향해 외치는 노래였지.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진단다. 이 노래 테이프를 만든 사람들은 엉성하게 녹음한 테이프를 가슴에 품고서는 꼭 혼자서만 다녔다고 해. 혹여 경찰에 잡히더라도 자기 혼자만 포획되도록. 누군가는 꼭 다른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전파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백기완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불렀고 이제는 윤상원의 목소리로 산 자들을 향해 내리꽂는 절규 같은 노래를 듣는 사람들 역시 주먹을 부르쥐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언젠가 네게 1980년대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고 싶다. 비록 그 숱한 오류와 돌아보기조차 싫은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대학생들이, 청년들이 살인적인 독재정권에 의롭고도 줄기차게 저항한 역사는 한국사, 아니 세계사를 통틀어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빛을 발한다. 백기완처럼 ‘산 자’와 윤상원같이 ‘죽은 자’의 육성이 넝쿨처럼 엉키고 담쟁이같이 역사의 담장을 타고 오른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은 언제나 그 빛의 한가운데에 있었어. 독재에 맞서 싸우다 제 몸에 불을 댕겼던 사람들도, 절망으로 그득한 밑바닥에서 술 취해 나뒹굴던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부르며 삶을 다지고 죽음 앞으로 나섰다.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의 깃발이자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공화국 헌법에 대한 찬가였다.

그런데 이 노래를 ‘국론 분열’의 우려가 있다고 나대는 사람들이 있구나. 아빠는 그 사람들의 나라(國)가 어디인지 묻고 싶어. <님을 위한 행진곡>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살 권리가 없다. 백기완을 고문하고 윤상원을 죽인 독재가 그립다면, 그들은 차라리 휴전선 넘어 북한으로 올라가는 게 맞을 거야. 그들이 원하는 나라는 그런 나라니까. 지은이가 멀쩡히 이 땅에 살아 있고 이 노래에 붙여진 사연들이 있는데도, <님을 위한 행진곡>에서 ‘님’이 김일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냐고 떠드는 ‘종북주의적’ 상상력의 소유자들도 활개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북한으로 가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여기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란 말이다.

이 노래가 불편한 자들은 민주주의가 불편한 거야. 사람을 반으로 꺾어버리는 고문이 넘쳐나고 중무장한 군대가 시민의 살을 헤집고 군화로 짓밟고 총으로 쏜 것을 당연시하는 파시스트들이다. 아직까지도 ‘광주 항쟁’이 아니라 ‘광주 폭동’이라 부르고 싶어 혓바닥이 들썩이는 자들이야. 그들의 코앞에서 아빠는 이 노래를 가사 하나 하나 씹으면서 불러주고 싶구나.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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