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때였다. 친구와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고 있었다. 집까지 7분은 더 걸어야 하는 지점, 낯선 중년 남자가 접근해 내 귀에 이상한 말을 흘려넣었다. ‘언어 성폭력’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놀라서 한마디 저항의 말도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를 피한 뒤 걸음 속도를 늦췄다. 그를 먼저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남자는 천천히 저 앞으로 걸어갔고 어느 순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때 왜 소리도 지르지 못했는지, 가까운 편의점으로 도망가지 않았는지, 한동안 후회했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저 불쾌한 경험을 한 번 한 걸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남자와 다시 마주쳤다. 집까지 빠른 걸음으로 3~4분 걸리는 지점, 그가 먼저 간 길이 하필 우리 집 방향이었다. 아니면 그가 나를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적 없는 길 한구석에서 그는 서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 성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다시 ‘그런 말들’을 던졌다. 노출증은 상대의 놀란 반응에 쾌감을 느끼므로 망신을 주면 도망친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그래서 ‘센 척’을 했다. 놀라지 않은 척, 떨지 않는 척하며 응수했다. “물건도 작은 게….”

오판이었다. 그는 노출증 환자라기보다 적극적인 성추행범이었다. 그의 얼굴과 말이 순식간에 분노를 내뿜었다. 내가 도망치자 쫓아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타나주기를 절박하게 바라며 달렸다. 마침 택시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택시를 마구 두들기며 세워달라고 외쳤다. 마침내 택시가 서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지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택시에 타자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며칠이 지나도록 진정되지 않았다. 쫓겼던 길을 지날 때면 가슴이 세차게 뛰고 숨이 가빠오곤 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일주일간, 그렇게 바싹 접근해 귀에 이상한 말을 흘려넣는 사람을 두 명 더 만났다. 낯선 중년 남자한테 ‘은밀한’ 언어 성폭력을 당한 평생 세 번의 경험이 모두 일주일 안에 일어났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 그들은 심리적으로 심하게 위축된 채 공포를 느끼는 내 상태를 귀신같이 감지해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페미니즘 책에서 글로 배웠던 것을, 나는 경험으로도 배웠다. 더 이상 그런 일을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 나이의 강인함을 지니게 된 지금도 그 귀신같은 감각만은 여전히 끔찍하게 느껴진다.

피해자가 짧은 옷을 입어서, 늦은 시간에 다녀서, 술을 마셔서? 모두 가해자가 잘못을 회피하고 떠넘기기 위한 핑계이고 트집이다. 세 번 모두 집 근처 주택가였고 난 긴소매 옷에 긴 청바지 차림이었다. 두 번은 벌건 대낮이었다. 장소, 시간, 피해자의 옷차림, 직업, 당시 행동이나 상태는 가해의 원인이나 책임과 아무 상관이 없다. 가해의 책임은 온전히 가해자에게 있다. 그런 가해가 흔하게 일반적으로 일어난다면, 이를 용인하는 구조와 사회 전체의 책임을 함께 물어야 한다.

슬픔을 나누고 증언을 공유하자

자신보다 약한 존재와 마주쳤을 때 그를 배려하고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공격하고 해를 가하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해, 즉 피해자가 될 확률을 줄이고자 험악한 인상과 쌍욕과 거친 말을 무시로 연습하는 것도. 살인자가 범행 동기랍시고 “여자들에게 무시를 당해서” 같은 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하지 않다.

신체적으로 크게 다친 적 없이 40대로 살아남은 것이 새삼 기적처럼 느껴져서 더욱 슬펐던 오늘, 강남역에는 화장실에서 피살된 여성을 추모하고 여성 혐오에 뿌리를 둔 증오 범죄를 고발하는 포스트잇들이 나붙었다. 그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며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눈물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이 눈물과 슬픔이 우리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슬픔을 나누고 증언을 공유하며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연대하여 싸우는 것이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래서 20년 전 일을 꺼내 이렇게 소상히 기록하고 증언한다.

기자명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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