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교회에서 체육대회 가는 곳이 있지? 서울 수유리 한국신학대학교대학원. 오늘날 한국신학대학교는 경기도 오산으로 이전해서 종합대학인 한신대학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70년대엔 네가 뛰어놀던 수유리 그곳이 한신대 캠퍼스였어.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대한민국을 휘어잡던 무렵, 그 막강한 골리앗 같은 권력에 3000만이 숨죽이는 것 같았지. 그래도 물맷돌을 휘두르며 나선 다윗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시 한신대는 그 용사들의 산실 같은 곳이었어.

당시 한신대학교는 전교생이 기백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1만명 이상의 학생 수를 자랑하던 다른 대학들보다 더 정권의 미움을 산 학교였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이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이 용맹한 신학도들은, 정부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사람의 목을 매달고, 초주검이 되도록 고문하고, 똥물을 끼얹고, 그 가족들까지 못살게 굴던 권력에 맞선 빛의 사자들이었단다. 학생뿐 아니라 교수들까지도.

1973년 한신대학교에서는 맹렬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시위 주도 학생들에 대한 제적을 요구했다. “다 잘라버리시오. 말 안 들으면 재미없소.” 마치 이스라엘의 왕이 났다는 소리에 갓난아이들을 죄다 죽여버리라고 소리 지르던 헤롯 왕처럼 말이야. 이 산천초목도 덜덜 떨 만한 호령에 한신대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단다. 이 대학의 학장님이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거야. 학생들을 지지하고 정부의 요구를 따를 수 없다는 시위였지. 그를 따라 교수님들이 줄을 서서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렸고, 이를 본 학생들도 앞다퉈 이발소로 달려가거나 자기 손으로 가위를 들어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일부 교직원도 삭발에 동참했다고 하니, 졸지에 한국신학대학은 승가대학(스님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방불케 하는 ‘빡빡머리’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단다.

ⓒ시사IN 이명익2015년 5월13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은 학생들이 5·18 민주화운동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1975년에는 이 작은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그 후에도 ‘한신’의 기세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어. 이즈음 정부는 각 학교의 학생회를 해체하고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의 군대식 학생 조직을 만들었다. 한신대에서는 되레 이 학도호국단이 주동이 돼 데모에 나섰다. 학도호국단 이름으로 시위에 나선 건 전국에서 한신대학교가 처음이었어.

1977년 4월7일, 교회에서 기념하는 ‘고난주간’이었어. 한신대 학생들은 교내 예배실에 모여 고난주간 예배를 드린 후 고난 선언문을 발표한단다. 이 고난 선언문에서 한신대 학생들은 저승사자처럼 무섭던 정권 퇴진을 입에 담게 돼. 그걸 읽은 건 학도호국단장이었지. 하지만 선언문을 다 읽기도 전에 경찰이 예배실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 그를 낚아채 끌고 나갔단다. 학생들이 분노와 모욕감으로 울부짖는 가운데 또 한 명의 학생이 단상으로 나서 선언문을 이어 읽었지만 그

역시 경찰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가고 말았어. 한 학년이 50명쯤 되던 대학의 학생 20명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았으니 그 의기(義氣)를 능히 헤아릴 수 있을 거야. 그 무렵 한신대 학생을 비롯해 진정한 ‘예수쟁이’들이 불렀던 찬송가 가사는 이렇다.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주시니 정의가 사나니.”

1979년 이 의기 왕성한 한국신학대학교에 한 신입생이 들어온다. 이름은 류동운. 성결교회 류연창 목사의 장남이었어. 아버지가 시무하는 성결교회 계열의 성결교 신학대학이 엄연히 있었지만 그는 굳이 한신대학교를 택했어. 한신대의 역사를 보았고, 그 학교가 추구하는 사회 복음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는 이미 정권의 쓴맛을 본 바 있었다. 아버지 류연창 목사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됐을 때 가택수색을 당하는데, 그 와중에 ‘불온한’ 메모가 발견돼 연행됐던 거지. 그때 나이 열다섯 살. 너와 동갑이었단다. 당시 정부가 얼마나 정신이 나갔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거야.

사연 많은 신학생 류동운이 1학년을 마치기 전에 한신대를 무던히도 미워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 같았다. 그러나 1980년, 군복 입은 살인마들이 대한민국에 도둑처럼 들이닥친단다. 그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고 이에 맞서는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했지. 5·18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이었다.

ⓒ영남일보한신대에 있는 ‘류동운 기념비’(맨 위). 그의 아버지 류연창 목사(위)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류동운은 경북에서 태어났지만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 류동운은 광주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에서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시위 도중 계엄사에 체포돼 엄청난 곤욕을 치르고 풀려난단다. 머리는 깨지고 온몸은 멍투성이로.

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아빠라도 그렇게 무서운 곳에서 구사일생 빠져나온 뒤엔 언감생심 안방의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군복과 비슷한 색깔만 봐도 비명을 지르며 와들와들 떨었을 거야. 하지만 류동운은 다시 집을 나서서 시민군의 일원이 돼.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이 역사를 위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시오.” 그의 마지막 일기였지.

아버지 류연창 목사 역시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옥살이를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도 했어. 민주주의든 자유든 어떤 세상없는 가치든 내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있어도 내 아들 목숨보다 무거울 순 없는 게 인지상정이야. 아버지는 제발 가지 말라고 아들에게 호소해.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아버지 붙잡지 마세요. 다른 집 자녀들은 다 희생하고 있는데 왜 자기 아들만 보호하려고 합니까? 평소 소신이 왜 변합니까? 아버지 설교 말씀에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를 붙잡지 말아주세요.”

그날 시민군이 되어 도청으로 향했던 아들은…

아버지의 설교를 인용하며 아버지의 손을 뿌리친 아들은 총총 역사의 어둠 속으로,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다 할 빛줄기 속으로 사라진단다. 계엄군이 도청을 함락한 뒤 그는 시신으로 발견돼. 아버지가 그 치아로 겨우 아들을 알아보았을 만큼 참혹하게 변해버린 모습으로.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졌던 신학생 류동운. 예수 잘 믿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그 뜻이 하늘에서 이뤄지듯 땅에서도 이뤄지이다’를 가르친 예수의 뜻을 깨우치고자 한국신학대학교를 애써 택했던 신학생 류동운은 지금 그의 동지들과 함께 5·18 묘역에 묻혀 있어.

이번 여행에서 아빠가 광주 5·18 묘역을 꼭 들르고 싶었던 이유는, 네게 우리 역사가 얼마나 긍지로 빛나고 영예로 눈부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경제적으로 잘살고 어느 정도로 힘이 센가도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한 나라의 국민들이 불의에 맞서 일어서고, 강도와 같은 독재자들에게 죽음으로 저항하며, 스스로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역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역사요 기억이기 때문이야. 전교생 200명의 신학대학이 보여준 용기는, 그리고 그 학교를 선택한 한 신학생이 택한 부활의 길은, 또 망월동에 누워 있는 수많은 묘비들은 우리 민족의 고난과 영광의 십자가이고, 항시 우리들의 머리를 찌르는 가시면류관이다.

5월18일이 다가온다. 이 나라와 백성이 길이 간직해야 할 혁명의 날이자 분노의 날, 동시에 희망의 날이. 그래서 광주(光州)는 빛고을이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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