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나가사키 두 도시를 방문한다면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요,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09년 11월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국으로 일본을 국빈 방문한 뒤 한 말이다. 7년 전 이렇게 자신의 희망을 피력한 오바마 대통령에게 마침내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

오바마 대통령이 5월26~27일 이틀간 일본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마친 뒤 히로시마를 방문할 수 있다는 구체적 신호가 감지됐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이 자칫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국’ 이미지를 지우고, 역사 왜곡과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해결과 관련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온 아베 신조 총리의 짐을 덜어주는 게 아니냐는 비판론도 적지 않다. 백악관은 5월6일 현재, 공식 입장을 삼간 채 신중 모드로 들어갔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가능성이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현직 미국 대통령 신분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6일 원폭 투하로 히로시마에서 약 14만명이 희생됐고, 사흘 뒤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져 약 8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고, 1939년에 시작된 2차 세계대전도 마침내 종전을 맞았다.

원폭 투하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낳긴 했지만, 대다수 미국인과 역사가들은 원폭 투하가 전쟁을 끝내고 미군의 전사를 방지했다는 측면에서 군사적·도덕적으로 “정당한 결정”이라고 인식해왔다. 현직 미국 대통령은 종전 이후 71년 동안 한 번도 히로시마 등 피폭 지역을 방문한 적이 없다. 방문 자체가 미국의 역사적 정당성을 훼손하고, 심지어 ‘사과’로까지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 여부를 놓고 미국 사회가 지금 시끌시끌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해 묵념이나 헌화를 한다면, 정치적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더욱이 올해는 11월 대선과 함께 의회 중간선거가 치러지는, 선거의 해다.

ⓒAP Photo2014년 4월23일 일본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스시집에서 만찬을 했다.

사실 2차 대전 이후 오늘날 미·일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우호적이지만, 원폭 투하 문제는 오랜 세월 양국관계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원폭 투하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은 논리적으로 ‘가해자’고 일본은 ‘피해자’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이 같은 ‘과거사’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최근 존 케리 국무장관이 역대 미국 국무장관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한 게 단적인 예다. 앞서 2008년에는 당시 민주당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원폭 70주년인 지난해에는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 대사가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1984년 히로시마를 방문한 바가 있지만 퇴임한 뒤였다. 2014년 초 마쓰이 고즈미 히로시마 시장과 다우에 도미히사 나가사키 시장이 케네디 대사를 방문해 오바마 대통령이 원폭 기념식에 참석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현재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대한 백악관의 기류는 일단 긍정적이다. 일본 〈니케이 신문〉은 미국 행정부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해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미국 정부가 공식 제의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백악관은 “어떤 결정도 내려진 바 없다”라면서도 보도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스탠퍼드 대학 부설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댄 스나이더 부소장은 워싱턴 외교가에서 영향력 있는 정보 소식지 〈넬슨 리포트〉의 편집장 크리스토퍼 넬슨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현재 분위기는 가는 쪽”이라고 밝혔다. 넬슨에 따르면, 대니얼 러셀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포함한 고위 관리 다수는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후 주창해온 ‘핵 없는 세계’라는 목표와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라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9년 4월 체코 프라하를 방문해 행한 연설에서 ‘핵 없는 세계’를 언급해 큰 감명을 줬다. 덕분에 그해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PA4월11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등 G7 외무장관들이 히로시마 원폭 위령비에 헌화하고 있다.

과거사 외면하는 아베 총리에게 힘 실어줄까 우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인사도 있다. 웬디 셔먼 전 국무부 정무차관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국익’을 위해서도 히로시마를 방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셔먼은 “위안부 문제로 불편한 관계를 겪어오던 한·일 양국이 지난해 12월 극적으로 협상을 타결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건 사과를 위해서가 아니다. 미국도 과거를 인정하되 미래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점을 한·일 양국 동맹에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미국 국익에도 이롭다”라고 주장했다. 스탠퍼드 대학 부설 아태연구소 신기욱 소장은 외교 전문 매체 〈더 디플로맷〉 기고문에서 “요즘 미국 대선 정국에서 (트럼프 후보처럼) 핵무기 확산을 고취하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핵무기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제고하고, 동북아시아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화해를 위해 오바마는 (히로시마를) 방문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여론에 민감한 의회 쪽에서는 아직 부정적 기류가 적지 않다. 비록 숫자는 계속 줄고 있지만 미국 사회에는 여전히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과 전쟁포로, 행방불명자 가족이 다수 생존해 있다. 이들을 유권자로 둔 지역구 의원 처지에서는 아무래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방문을 강행할 경우 과거사 문제로 한국·중국 등과 불편한 관계를 맺어온 아베 일본 총리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아베 총리가 오바마의 방문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할 경우 일본의 과거사 행보가 오히려 뒷걸음질 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집권하는 동안 미국 현직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을 강행할 경우 일본이 2차 대전의 ‘독특한 피해국’이란 일본 측 논리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다트머스 대학의 일본통인 제니퍼 린드 교수는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 가져올 여러 부정적 파장을 감안해 방문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린드 교수는 특히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방문을 강행할 경우 미국 내 반발은 물론 동맹국인 한국의 분노를 촉발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신기욱 소장도 〈더 디플로맷〉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이 미국과 동북아를 포괄하는 역사적 화해 과정이 아니라 단순히 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쪽으로 받아들여질 경우,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전범 행위를 미국이 비켜가려 한다는 중대한 우려가 특히 한국과 중국에서 제기될 것이다”라고 썼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더라도, 과거사 문제로 미적거리는 일본에 따끔한 경고를 줘야 한다는 의미다.

오바마 대통령의 일본 원폭 투하 지역 방문이 성사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이런 우려들 때문에 방문하더라도 ‘헌화’ 등 사과로 비쳐질 수 있는 일체의 행위를 생략한 채 핵 문제에 초점을 맞춰 ‘핵 없는 세계’의 필요성을 거듭 역설할 가능성이 크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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