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시험 공부하느라 네 이마에 때 아닌 주름이 잡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프다. 어찌 보면 현실에는 하나도 쓸데없는 용어 암기인데, ‘왜 이걸 공부해야 하나’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따지고 보면 네가 힘겹게 외우는 개념과 제도와 사건들은 요즘과 동떨어진 세계의 것만은 아니란다.

네가 한창 외우고 있는 조선과 구한말 시대 사건들 가운데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을 다시 읽어볼까? 우선 개국 연호가 사용되고 과거제도가 없어졌지. 조세의 금납화가 실현되고 과부 개가가 허용되고 조혼은 금지됐어.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내용이 있다. 그건 ‘연좌제 폐지’라는 거야.

연좌제의 뜻은 너도 알고 있겠지. 자신이 저지른 죄가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죄로 인해 처벌받거나 책임지는 제도다. 흔히 역적들의 경우 삼족을 멸한다고 하지? 무시무시한 의미다. 죄인의 처가·외가·친가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거란다. 실제로는 직계 3대, 즉 할아버지·아버지·아들대의 형제와 그 자식들을 처벌하는 식이었지. 그렇다 해도 연좌제의 끔찍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위키피디아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왼쪽부터).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김옥균 등 주모자의 가족은 연좌제로 피해를 보았다.

인조 때 반란을 일으킨 이괄이 결정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결심한 것은 한양에서 들이닥친 금부도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이괄의 아들이 역모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그를 압송하겠다는 것이니까. 이때 이괄이 외친 한마디는 ‘연좌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고 봐야 할 거야. “자식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도 있다더냐?” 그리고 이괄은 칼을 들어 금부도사 일행의 목을 쳐버린 뒤 반란의 깃발을 든단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기겁함과 동시에 잔인함을 발휘하여 이괄의 부인과 며느리의 목을 쳐버린다. 기존 연좌율(緣坐律)을 뛰어넘는 폭거였지. 원래 여자들은 죽이지 않고 노비로 보내는 게 관례였거든.

이렇듯 ‘자식이 역적이면 부모도 역적, 부모가 역적이면 자식도 역적’이던 연좌율은 조선 시대 내내 맹위를 떨쳤어. 개항을 하고 외국 사람들이 한양에 몰려와 살 때에도 달라지지 않았지. 이번 네 시험 범위에 등장하는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서재필·박영효·홍영식 등의 가족은 ‘사육신 이래 최대’라는 연좌제의 희생자가 된다.

김옥균의 아버지와 동생은 옥에 갇혔다가 죽고, 박영효의 아버지도 감옥에서 굶어죽었다. 홍영식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집단 자살을 명한다. 서재필의 경우엔, 직계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이복동생들까지 죄다 처형당했어.

이 끔찍한 피바람을 보면서 당시 서울 정동에 모여 살던 외국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이야기했을 거야. “오우 테러블. 조선, 무서운 나랍니다.” 일본의 1만 엔짜리 지폐에 새겨진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 개화파의 은근한 지지자였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동자 가족들의 참극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독설을 퍼부었다.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경성(京城)에 출현했다. 나는 이 나라를 보고 야만인이라 평하기보다는 요마악귀(妖魔惡鬼)의 지옥국(地獄國)이라 평하고자 한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군사정권 시절에는 시국 사건 관련자 가족도 연좌제의 희생양이 되었다. 위는 인혁당 공판 장면.

이 시건방진 일본인이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부아가 치밀다가도 문득 우리 조상들이 한 일을 보면 슬며시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너희들은 안 그랬냐?”라고 항변하기엔, 우리의 연좌제가 너무 저열하고 잔인했으니까.

이미 말했듯이 연좌제는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그림자를 드리운단다. 당장 몇 년 뒤 고종의 러시아어 통역관 김홍륙이 황제와 황태자를 독살하려고 커피에 독을 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부 대신들은 연좌제를 되살려 김홍륙의 가족까지 처벌하려 했다. 이에 〈독립신문〉은 “역적이라도 노륙(역적의 가족을 죽이는 일)과 연좌를 적용하지 않고 무슨 죄를 짓더라도 함부로 가두거나 벌주지 말 것을 선포했는데, 갑자기 노륙과 연좌를 쓰자는 건 법을 어기는 것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했어. 이 이슈로 인해 2차 만민공동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에도 깨친 사람들은 ‘연좌’에 대해 진심으로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흉물스러운 이빨 드러내는 연좌제의 그림자

그러나 연좌제는 마치 드라큘라처럼 살아남는다. 특히 좌우익 갈등과 전쟁을 거쳐 남한에 콘크리트 같은 반공 국가가 자리 잡으면서, 좌익이나 공산당 전력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들까지 거의 예외 없이 되살아난 연좌제의 희생양이 됐지. 공산당과 관계없이 독재에 항거한 사람들까지도 ‘호적의 빨간 줄’ 때문에 혀를 끊는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어. 전쟁 당시 월북한 삼촌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가지 못해 통곡해야 했던 아빠 선배의 사연은 축에도 들지 못할 만큼 광범위하면서도 촘촘한 연좌제가 우리나라를 뒤덮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연좌제는 정부나 권력만이 휘두르는 칼은 아니야. 스스로 진보라고 자처하는 분들을 통해서도 연좌제의 그림자는 언뜻언뜻 그 흉물스러운 이빨을 드러내기도 한다. ‘친일파의 손자가 국립박물관장을 할 수 있느냐’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빨갱이의 아들이 어떻게 경찰을 하느냐’는 억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아빠는 여긴다. 100년 전 〈독립신문〉이 주장했듯 “역적이라도 연좌를 적용할 수 없는” 것이므로, 연좌제 폐지의 정신은 할아버지가 친일파든 빨갱이든 그 혐의가 무엇이든, 그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야.

너도 즐겨 봤던 드라마 〈송곳〉의 열정적인 노동운동가의 모델이 된 사람이 있어. 아빠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권리를 일깨우고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수십 년 동안 역설해온 노동상담가야. 그런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노동 조직 중 하나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으로부터 강연 보이콧을 당했다. 부인이 교장으로 재직 중인 학교에서 교사들이 ‘부당해고’ 됐는데 이에 대해 노동상담가로서 학교 측을 대변(代辯)하는 발언을 했다는 거였어.

해고가 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학교와 해직 교사들이 다툴 사안이지 교장의 남편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야. 또 ‘학교 측 대변’이라는 것도 아내의 학교와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의견 표명을 집요하게 요구받고서, 학교 측의 입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정도의 얘기를 한 것이 다였어(애초에 부인의 문제를 남편에게 집요하게 묻는 것 자체가 연좌제적 발상임을 밝혀둔다). 하지만 “가족이 저지른 부당노동행위를 방관하며 노동 강의를 하는 건 문제가 있다”라는 식의 구한말 연좌제 뺨치는 발언이 ‘교사들’에게서 나오고, 사실관계를 다투는 문제에서 전교조의 주장에 반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공적 활동을 막아버리며, ‘전교조 교사 탄압하는 아무개는 물러가라’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진보’가 어디까지 ‘퇴행’할 수 있는지를 그야말로 몸부림치며 보여주고 있구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비웃음이 바람결에 들려온다.

“가장 수구적인 연좌제가 아직도 조선에 출현하고 있다. 그것도 진보에 의해서. 나는 이 나라를 보고 야만인이라 평하기보다는 아직도 미성숙한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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