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 없는 사회’가 해산하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가 학벌로 뭉친 부패한 사회임을 고발하고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한 단체가 스스로 해산하기로 한 것이다. 해산 선언문에서 이들은 한국은 이제 자본 앞에서는 학벌도 별 힘을 쓰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명문대 나오면 뭐하나, 백수인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학벌보다 집안 배경이 훨씬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과연 학벌은 끝났는가?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나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학벌은 붕괴했다’는 말을 하곤 했다. 학벌이 서울대부터 가장 마지막에 있는 대학까지 일렬로 서열화를 이룬, 강한 구조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런 의미에서의 학벌은 밑에서부터 이미 붕괴되었다고 말이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홍동 국숭세단’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대학과 지방의 몇몇 국립대를 제외하고는, 이미 ‘서열’이 무의미해졌다.

몇 년 전부터 지방 고등학교 교사와 지방대생들을 만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교사들도 과연 학생들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회의했다. 대학에 보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방의 많은 대학은 입학생에 비해 졸업생 수가 현저하게 적다. 졸업 앨범을 보면 학생보다 교수가 더 많은 학과도 제법 있다. 서울 소재 대학으로 편입하거나 자퇴해서 학벌 사다리의 아래가 사라져가는 것이다.

ⓒ박해성 그림

무엇보다 ‘대학’ 그 자체가 지녔던 문화적 가치가 생존주의 시대에 큰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4년제 지방대를 나오는 것은 생존에 방해가 되기까지 한다. 그러니 경제 자본이 풍부하지 않은 계층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과거에는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았지만, 지금은 생존과 취업이 더 중요하다. 취업에서의 ‘안정성’과 ‘벌이’가 대학 서열을 압도한다.  

중상 계층 이상의 독점물이 되어버린 ‘학벌’

‘대학이 밥 먹여주느냐’는 비판은 문자 그대로 대학이 먹고사는 데 큰 도움이 못 된다는 이야기다. 어지간한 대학을 나와서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또한 대학이 밥은 못 먹여줘도 보증해주던 문화 자본, 사회 자본으로서의 가치에 사람들이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대학이 보증하던, 상징적이고 사회적인 ‘위신’이라는 가치도 사라졌다. 의미 있는 것은 경제 자본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여전히 학벌은 강하고 더 강화되리라는 점이다. 하층에서 대학이 의미가 없어질수록 역설적으로 상층에서는 대학이 큰 의미를 가진다. 경제 자본뿐 아니라 문화 자본으로서 가치를 함께 가진다. 과거에 학벌이 그나마 소규모일지라도 사회 이동을 가능하게 한 ‘긍정적’인 기능이 있었다면, 이제 학벌은 중상 이상의 계층에 ‘독점물’로서 가치를 가진다. 이른바 명문대 안에서도 특목고나 자사고 출신이 ‘이너 서클’을 만들어 이런 가치를 독점한다. 학벌이 대학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출신고-대학’으로 더 강화된 현상이 나타난다. 학벌(學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층이 더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형태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최근 학벌 사회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는 ‘학(學)’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이지 ‘벌(閥)’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너진 것은 ‘학’의 사회학적 기능이지 ‘벌’의 폐쇄적이고 신분제적인 성격이 아니다. ‘벌’이 없는 ‘학’은 기껏해야 6두품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따라서 학벌의 신분제 성격은 ‘벌’을 독점하는 계층에 의해 신분제적으로 더 강화되었다. 출신 대학에 따라 사람을 서열화한 학벌 사회의 해체가 아닌 더 강력한 신분제 사회의 출현이다.

기자명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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