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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양적완화’ 논쟁 들여다보니


한국형 양적완화=코빈식 양적완화?


한국 최초 양적완화 주창자, 정부여당 비판

 

조선업 구조조정 초읽기… 엇갈린 시선

 

 

조선업 구조조정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문제는 어디까지, 어느 정도의 수위로 구조조정을 하느냐다. 이 결정을 내리려면 조선업이라는 산업 자체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 만약 조선업이, 어떤 조치를 취해도 수익성을 회복할 수 없는 사양산업이라면 공적자금을 투입해도 미래가 없다. 이 경우 구조조정은 사실상 조선업을 ‘청산’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반대로 조선업의 경쟁력과 전략적 가치가 여전히 크다면, 인적·물적 핵심 역량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쪽으로 산업구조를 조정해야 한다.

업계 종사자들, 애널리스트와 이코노미스트들, 조선업 연구자들, 해외의 관찰자들 사이에서도 조선업의 미래를 둘러싼 이견이 존재한다. 이들의 갑론을박을 정리했다.

ⓒ대우조선해양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의 해양 플랜트 전문 건조구역.

노동집약 산업 vs 고부가가치 가능

조선업 사양산업론의 논리 구조는 대체로 이렇다. 조선업은 노동집약 산업이다. 저렴한 노동비용(임금)이 경쟁력이다. 선진국은 인건비 경쟁에서 개발도상국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노동집약 산업은 역사적으로 후발 국가로 이전하는 산업 사이클을 보여준다. 조선업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전되었고, 이제 한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조선업은 가망 없는 산업이므로 최대한 빨리 대규모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 답이다.

하지만 현장 관찰자와 연구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조선업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다”라고 주장한다. 조선업이 노동집약 산업은 맞다. 하지만 조선업의 핵심 경쟁력은 숙련노동(기술을 가진 노동)의 유무에서 결정된다. 단순한 ‘인건비 절감 경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동차산업에서처럼 생산공정의 기계화·자동화가 쉽다면, 숙련노동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업의 생산공정은 자동화하기 매우 어렵다.

대형 조선소들은 육지의 공장에서 ‘블록’을 먼저 만든다. 이 블록들을 물 위의 도크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배를 만든다. 이른바 ‘블록공법’이다. 특히 도크 위에서 하는 조립 작업에는 숙련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배마다 모양과 기능이 제각각이고, 사람이 일일이 들어가야 하는 공정이 많으며, 바다 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조선업 연구자인 박종식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은 “현장의 숙련공들은 신입에게 ‘용접기 잡는 법 빼고 육지에서 배운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라고 말했다.

현장 생산자의 숙련 이상으로 중요한 숙련노동력이 있다. 설계다. 조선회사는 일단 주문부터 딴 뒤 배의 용도, 규모, 속력, 연비 등을 주문자의 요구에 맞춰 매번 최적화된 설계를 해내야 시장에서 살아남는 ‘주문생산’ 산업이다.

배의 성능을 결정하는 것은 엔진만이 아니라고 업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중요한 변수는 선형, 즉 배의 형태다. 배가 저항을 적게 받을수록 속도는 올라가고 연비도 좋아진다. 갈수록 선박에 대한 환경 규제가 강화되기 때문에, 연료를 많이 먹는 배는 연비와 규제의 이중 부담을 져야 한다. 선형은 대부분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어 표준화가 어렵고, 배마다 들어가는 장비와 필요한 구조가 다르다. 수주 가격도 중대한 제약 조건이다.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최적화된 선형을 개발하는 것이 설계 능력의 핵심이다. 한국 조선업은 유조선, LNG선, 대형 컨테이너선 등 설계 능력이 특히 중요한 시장에서 경쟁력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조선업에서 설계와 숙련노동이 중요하다는 것은 값싼 단순 노동력을 대량으로 투입하거나 공정을 표준화하는 것으로는 선두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의미다. 현장 관계자들이 보기에 전자가 중국, 후자가 일본의 전략이다. 둘 다 대량생산 산업에 좀 더 어울리는 접근법이지만, 조선업은 주문생산 산업이다. 한국 조선업은 설계와 생산 역량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차별적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낙관론자의 주장이다.

생산능력 과잉 vs 보릿고개일 뿐

일감이 말라버린 현 시점에서 한국 조선업의 설비와 고용 인력은 과잉 상태다. 일시적인 위기일까, 구조적인 과잉일까.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구조조정의 폭이 결정된다.

각종 지표는 구조적 과잉론의 손을 들어준다. 조선업과 해운업의 경기를 보여주는 척도로 흔히 ‘발틱운임지수(BDI)’를 쓴다. 원자재, 곡물 등을 운반하는 벌크선의 시황으로 국제무역이 어떤 상태인지 나타내는 지표다. BDI는 세계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가을까지만 해도 1만1000을 웃돌았다. 그런데 올해 5월 초 현재 640까지 빠진 상태다. 이 거대한 폭락은 현재의 세계시장 상황이 얼마나 가혹한지 보여준다. 또한 조선·해운업이 다른 산업에 비해 얼마나 경기변동에 민감한지도 보여준다. 조선·해운업은 생산설비와 고용 인력을 경기에 맞춰 최대한 유연하게 운영해야 생존할 수 있는 산업이다.

그러나 이 논리를 연장하면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세계 경기가 호전되는 경우, 현재의 생산능력이 오히려 부족하게 될 수도 있다. 선박 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2020년 이후엔 친환경 기술의 수요가 늘어나게 되는데, 이 역시 선체 설계 능력이 앞선 한국 조선업에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연합뉴스대우조선해양 거제 옥포조선소에서 직원이 선박 용접을 하고 있다. 조선업의 핵심 경쟁력은 숙련노동의 유무에서 결정된다.

오랫동안 조선업 리포트를 작성해온 박무현 애널리스트(하나대투증권)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조선업 위기의 본질은 무리한 해양 플랜트 산업 진출로 인한 유동성 위기다. 주문생산 산업의 핵심 경쟁력은 설계 능력이고, 우리는 선박 설계에 경쟁력이 있지만 해양 플랜트에는 없다. 이제 해양 플랜트를 떨어내는 단계고, 선박으로 무게중심 이동이 이뤄지면 위기는 해소된다.” 그는 섣부른 구조조정으로 핵심 역량을 잃는 것이야말로 경쟁국인 일본과 중국이 바라는 시나리오라고 주장했다.

낙관론은 아직 예측에 기댈 뿐이다. 조선회사들의 수익률은 여전히 낮고 주가는 꾸준히 바닥을 기고 있다. 한국의 조선업 대호황을 이끌었던 중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은 재현되기 힘들다. 금융권의 한 시니어 이코노미스트는 “기술력이 앞서 있다는 대우조선해양이 몇 년째 매각되지 않고 있다. (이 회사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수요가 회복되면’이라는 전제는 현재까지는 불투명한 기대에 가깝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박무현 애널리스트는 “대우조선해양은 방위산업체이기도 해서 해외 구매자에게 문호를 열지 않으려다 보니 생기는 일일 뿐이다”라고 반박했다.

위기 성격 따라 ‘금융의 판단’이 달라져야

2015년 1월 OECD는 ‘한국 조선산업과 정부 정책’이라는 평가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한국 조선산업의 장점으로 앞선 기술력을 꼽으면서도, 채산성이 나빠지면서 부채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고 경고했다. 더 나쁜 시나리오는 그다음이다. OECD는 한국의 조선소는 죽도록 내버려두기엔 너무 커서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논리가 작동할 것이라고 봤다. 정부가 조선산업(대마)을 살리려고 여러 금융업체의 팔을 비틀어 대규모 금융 지원을 강행하다가 금융기관의 연쇄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암시다.

이 시나리오의 타당성 역시 조선업 위기의 성격을 어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조선업이 해양 플랜트 진출 실패로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빠져 있을 뿐 선박 분야 경쟁력이 여전히 탁월하다면, 금융 지원이 은행 부실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 당장의 유동성 위기만 극복하면 충분하다는 낙관론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선박 분야도 과잉 설비와 수요 부족의 덫에 빠져 있다면, 그때는 조선업체의 부실이 은행으로 전염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지원’이 아니라, 오히려 은행과 조선·해운업 사이의 금융적 관계를 ‘차단’하는 것이다. 앞서의 시니어 이코노미스트는 비관론자에 가깝다. “한국 경제가 대기업 몇 개, 하다못해 조선업 전체의 부실 처리 정도로 리세션(경기 후퇴)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실이 금융으로 이전되면 그때부터는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경기민감형 중후장대형 산업’의 딜레마

조선업은 극도의 경기민감형 업종이다. 동시에 중후장대한 설비와 고숙련 노동자가 필요한 산업이다. 이것이 딜레마다. 경기민감형 업종은 호·불황에 따라 생산능력(설비와 인력)을 자유자재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어야 한다(유연성). 그러나 중후장대 설비는 쉽게 사고팔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고숙련 기술자도 조직 내에 최대한 축적해둬야 한다. 호·불황에 상관없이 일정한 비용(고정비용)이 계속 지출된다.

조선업계는 이런 딜레마에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했다. 우선 불황기엔 ‘남아도는 생산능력’을 투입할 신규 사업을 발굴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해양 플랜트 붐이 인 것은, 해양 플랜트가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선박 수주가 끊기면서 남아돌게 된 생산능력을 어떻게든 사용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해 출간된 〈축적의 시간〉에서 김용환 교수(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는 고용의 경직성이 대형 조선사들을 신규 사업에 뛰어들도록 사실상 강제했다고 설명했다. “경기 변동과 시장 상황에 따라 고용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보유 인력으로 할 다른 산업(해양 플랜트)을 찾아 나선 거지요.” 신규 사업은 정규직뿐 아니라 비정규·하청 노동자도 일부 흡수했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박사는 “2008년 금융위기 직후 선박 분야에서는 일자리가 대규모로 사라졌는데, 해양 플랜트 분야가 그 노동력을 일부 흡수한 덕에 충격이 완화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는 고정비용 지출의 타개책이었던 해양 플랜트는 설계 능력과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은 탓에 조선업계에 대규모 손실로 돌아왔다. 또 한편으로 조선업계는 사내하청과 외주화 등으로 최대한 노동유연성을 확보했다. 이 대응 역시 딜레마를 낳았다. 해양 플랜트와 선박 생산공정은 표준화가 어렵고 숙련공의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서 과도한 노동유연성은 품질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

한국의 조선업은 해양 플랜트로 사업을 다각화해 고정비용을 무마하는 전략과, 사내하청에 의존하는 노동유연화 전략에서 모두 딜레마에 빠졌다. 조선업 구조조정을 어느 선까지 진행해야 할지를 기획하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지원책과 대책 없는 조선업 포기론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산업에 대한 전문적이면서도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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