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한국형 양적완화’ 논쟁 들여다보니


한국형 양적완화=코빈식 양적완화?


한국 최초 양적완화 주창자, 정부여당 비판

 

조선업 구조조정 초읽기… 엇갈린 시선

 

 

최배근 교수(건국대 경제학)는 요즘 매우 바빠졌다. 그는 2년 전부터 ‘한국판 양적완화’로 가계부채 문제를 돌파하자고 주장해왔다. 한국 최초의 양적완화 주창자인 셈이다. 미국·일본·유럽연합(EU) 같은 경제 대국들이나 시행한다는 양적완화가 한국에서 가능할까? 최 교수의 주장은 ‘소수 의견’으로 남았다.

새누리당이 20대 총선 공약으로 ‘한국형 양적완화’를 내걸었다. 최 교수가 주장해온 가계부채 문제도 양적완화의 과제에 포함시켰다. 여러 언론이 최 교수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배근 교수는 정부·여당의 ‘한국형 양적완화’ 방안에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같은 물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삼키면 독물로 변한다. 양적완화 역시 기업 구조조정이나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효율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재벌 가문의 경영 책임을 무마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도 있다고 최 교수는 말했다.


 

ⓒ시사IN 신선영최배근 교수는 2년 전부터 양적완화로 가계부채 문제를 돌파하자고 주장해왔다. 소수 의견이었던 최 교수의 의견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한국형 양적완화’를 내걸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양적완화의 개념 자체가 너무 모호하다. ‘한국형’이란 수식어가 붙으면서 더 복잡해졌다.
사실 양적완화에 대한 통일된 개념은 없다. 나라마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각국에서 아직 실험 상태니, 특정 사례를 양적완화라고 기계적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양적완화를 기준으로 ‘맞다, 틀리다’라고 해서도 안 된다.

정부·여당의 ‘한국형 양적완화’에 대해 벌써 ‘(정부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중앙은행의 역사를 봐야 한다. 사실은 (유럽에서 시작된) 중앙은행의 태생 자체가 정부와 무관하지 않다. 당초엔 민간은행이었는데, 정부로부터 ‘이 은행만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는 독점적 권한(발권력)을 얻으면서 중앙은행이 된 것이다. 이렇게 중앙은행이 되면 그 대가로 (화폐를 발행해서) 정부 재정을 지원했다. 발권력과 재정 지원을 맞바꾼 거다.

중앙은행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정부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로 들린다.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물가 안정’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은행이 정부의 공공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화폐를 마구 찍어내 물가를 올리면, 일종의 배임 행위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을까.
‘중앙은행의 최대 임무는 물가 안정’이란 명제를 너무 당연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명제에는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가가 오르면 자산가와 일반 서민 중 어느 쪽의 피해가 클까? 당연히 돈이 많은 자산가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양적완화를 개시할 당시, 보수주의 단체인 티파티가 크게 반발했다. 돈이 풀리면 화폐가치가 떨어져(물가가 인상되어),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준 폐지론’까지 나왔다. 이처럼 자산가와 금융 관련 세력은 물가에 민감하다. 이들이 중앙은행 시스템을 독점하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최대 임무가 물가 안정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그러나 미국 연준의 경우, 물가 안정보다 고용을 더욱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종의 계급 타협이다. 돈을 찍어내는 권력을 독점한 중앙은행이 돈 없는 사람들에겐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통화정책을 운영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중앙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다.

지금까지 주로 가계부채(특히 주택담보대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양적완화를 제기해왔다.
한국은행이 양적완화 방식으로 돈을 발행해 주택금융공사에 출자하는 방안이다. 주택금융공사는 이 자금으로 대출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가구 중 희망자의 주택을 매입한다. 희망자 가구는 부채를 정산한 뒤 남는 금액을 가진다. 그리고 살던 집에서 장기임대 조건으로 살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주택들이 매물로 쏟아져 나와 부동산 시장을 경착륙시키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해당 가구 역시 부채 상환 부담에서 벗어나 소비할 여력이 생긴다. 가계 소비가 살아나야 내수가 활성화되고, 기업들 역시 투자하게 된다.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낸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주택금융공사가 발행하는 MBS(주택저당증권)를 한국은행에 인수케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부동산 거품을 만들어 정권을 연장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행이 MBS를 매입한 돈이 금융기관들을 거쳐서 다시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면 집값을 올려놓을 수 있다. 부유층은 물론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 시장에 묶인 중산층의 지지도 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욱 악화시키는 방안이다. 더욱이 새누리당 방안은 (지난해 안심전환대출과 비슷하게) ‘변동금리-일시상환’ 대출을 안정적인 ‘고정금리-분할상환’으로 바꿔주는 것인데, 과연 유효할까? 안심전환대출의 경우 112만 가구가 ‘적격자’였다. 그런데 30만 가구만 상환 조건을 갈아탔고, 나머지 80만 가구는 포기했다. 원리금 상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이자와 함께 원금도 갚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포기한 사람들이, 다시 시행되는 비슷한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을까?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금 규모를 어느 정도로 추산하는가.
현재 원리금 상환 부담 때문에 장기분할 상환으로 갈 수 없는 가구의 주택담보대출금이 모두 20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재원은 20조원 정도면 충분하다. 각종 금융기법을 잘 운용하면 200조원 규모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기업 구조조정에 양적완화를 활용하는 방안은 어떻게 보나.
기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다.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 민간은행들은 2010년 이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부실기업들로부터 대출금을 회수했다. 그러나 국책은행들은 오히려 지원금을 퍼부었다. 이런 행태는 당시 정부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현 정부와 보수적 경제학자들은 산업은행을 공격하면서 책임을 덮어씌우고 있다. 국책은행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몰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국가가 양적완화로 조달한 돈이 특정 회사의 구조조정 자금으로 들어가는 경우 해당 기업은 국유화해야 한다. 미국도 지난 금융위기 당시 사실상 그렇게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국가 자금을 투입하면서도 대주주(재벌 가문)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갈 것 같아서 걱정된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조선업과 해운업이라면, 산업 자체를 살릴지 없앨지, 산업 내 기업들을 모두 유지해야 할지 혹은 일부를 청산하거나 합병해야 할지 등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살리는 경우, 불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한동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살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면, 비로소 자금 투입 방안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금 투입 방법 중 재정지출보다 양적완화가 낫다고 본다.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떻게 전망하나?
지금은 5대 산업(조선·해운·철강·화학·건설)이 취약 업종으로 불린다. 내가 보기엔 전기·전자 쪽도 위험하다. 앞으로 제조업 부문의 군살 빼기가 진행되면 한국 경제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질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인위적 경기 부양으로 경제성장률 2%대를 유지해왔다. 충격이 현실화되면 성장률이 1%대 초반으로 내려앉을 수 있다. 더욱이 내년부터 부동산 시장의 조정이 올 가능성도 있다. 자칫 장기 불황이라는 끔찍한 상황으로 돌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들이 현실화되기 전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 일단 문제가 터져버리면, 이를 해결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게 불어나게 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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