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한국형 양적완화’ 논쟁 들여다보니


한국형 양적완화=코빈식 양적완화?


한국 최초 양적완화 주창자, 정부여당 비판

 

조선업 구조조정 초읽기… 엇갈린 시선

 

 

지난 4·13 총선 당시,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돌연 ‘한국형 양적완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새누리당의 총선 참패로 이 공약은 물 건너가는 듯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불을 지폈다. 4월26일, 박 대통령이 직접 “한국판 양적완화 정책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라고 밝힌 것이다. 이를 두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양적완화가 뭔지 모를 것 같다”라고 농담을 했다. 일부 언론은 칼럼을 통해 ‘안철수 대표는 양적완화를 알까’라며 양적완화 논쟁에 뛰어들었다.

정치 지도자들의 경제 지식을 둘러싼 해프닝 같지만, 이 논쟁은 의외로 ‘사태’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양적완화는 아직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든 개념이기 때문이다. 양적완화가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불리는 것은, ‘새롭게 실험 중’이며 ‘아직 검증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런 개념에 ‘한국형’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으니, 그 정체가 미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개념이 모호한 만큼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기도 쉽다.

사실 새누리당이 당초 표명했던 한국형 양적완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해결에 필요한 자금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한은)이 ‘새로 발행한 돈’으로 조달하자는 것이다. 이런 일을 추진할 국책 금융기관들이 있다. 기업 구조조정 부문에서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다. 대우조선·현대상선·한진해운 등 부실기업들의 총부채 가운데 60% 정도가 두 국책은행에서 빌린 돈이다. 이 기업들이 제대로 상환하지 못하게 되면 국책은행들은 채권자로서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다. 가계부채 부문에는 주택금융공사가 있다. 이른바 유동화 기법으로, ‘변동금리-일시상환’이라는 위험한 조건의 주택담보대출을 안정적인 ‘고정금리-분할상환’으로 바꿔주는 일을 해왔다. 상환 기간도 크게 늘릴 수 있다.

한국형 양적완화에서, 한은은 국책 금융기관들에 직접 자금을 지원한다. 돈을 찍어내 국책은행들이 발행한 채권(정부가 보증한다면 사실상의 국채)을 바로 매입하면 된다. 한은이 국책은행들에 돈을 빌려준다는 이야기다. 이 돈은 갚아야 하지만 만기는 꽤 길 것이다. 혹은 한은이 국책 금융기관에 빌려주기보다 투자하는 형식(출자)을 취할 수도 있다. 국책 금융기관들 처지에서는 갚을 필요 없이 안정적으로 사용할 돈(자본금)이 늘어난다. 이런 방법으로 조달한 돈을 기업 구조조정이나 가계부채 조정에 사용하면 된다.

언뜻 보면 ‘한국형 양적완화’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중앙은행이 국가적 차원에서 긴급한 공적자금을 정부에 공급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해서 안 되는 일이다. 현대 국가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정부와 중앙은행 사이의 규범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정부도 가계와 마찬가지로 쓸 수 있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돈을 복지나 일자리 창출 등에 마구 투입해 인기를 올릴 수 있다. 가계는 빚을 못 갚으면 파산하지만 정부는 파산할 염려가 없다. 국채라는 ‘종이 쪼가리’를 중앙은행에 건네주고 돈을 발행하라고 명령하면 된다. 그러나 정부가 원할 때마다 돈을 찍어내다 보면, 통화량이 지나치게 증가해서 엄청난 규모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 국가에서는 ‘정부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규범이자 미덕으로 간주된다. 원칙적으로 정부는 세수 및 ‘민간에서 빌린 돈(국채를 중앙은행이 아니라 민간에 팔고 받은 돈)’으로만 공공지출을 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중앙은행에게 달라고 하면 안 된다. 모든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공공사업을 위해 중앙은행에서 직접 돈을 빌리는, 그러니까 국채를 발행해 바로 중앙은행에 파는 일이 제한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강봉균 새누리당 선대위원장은 ‘한국형 양적완화’를 총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오른쪽은 이주열 한은 총재.

한국형 양적완화는, 정부가 공공사업 추진에 필요한 자금을 한은으로부터 직접 조달하려는 정책이다.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명백한 침해다.

더욱이 한국형 양적완화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영국·일본 등이 시행한 양적완화와도 많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들은 정책금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전통적’ 방법으로 통화량을 조절해왔다. 물가인상률이 지나치게 높을 때는 금리를 올려 통화량을 줄이고, 반대로 물가인상률이 낮을 때는 금리를 내려 통화량을 늘리는 식이다.

소비자들은 물가 인하를 선호하지만,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들의 숙원은 물가인상률을 높이는 것이었다.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다. 예컨대 지금 100만원인 피아노가 석 달 뒤쯤에 80만원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비자들이 구입을 늦출 것이다. 피아노 생산 기업의 매출은 악화된다. 모든 경제주체가 이렇게 움직이면 어떤 기업도 상품을 팔지 못하게 되고, 노동자들은 해고되며, 소비는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물가가 정체되거나 심지어 떨어지는 디플레이션 현상이다.

중앙은행들은 디플레이션 위기를 차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가인상률을 높이려 했다(목표는 겨우 2% 정도였다). 정책금리를 계속 내리다 보니 0%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물가인상률은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책금리를 0% 이하로 내릴 수는 없다. 결국 금리 조절이 아닌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물가 인상에 나서게 된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Bank Of England)의 ‘양적완화 해설’ 자료에 따르면, 비전통적 방법은 ‘돈을 경제에 직접 주입(direct injections of money into the economy)’하는 것이다. 어떻게? 민간은행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국채를 중앙은행이 매입해주는 것이다. 국채 매입 대금은 해당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에 개설해둔 계정에 꽂아준다. 민간은행이 가진 ‘보유금(reserve)’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물론 선진국 중앙은행은 민간은행에 대출을 강요할 수 없다. 다만 보유금을 증가시켜주면, 그 돈이 대출 등을 통해 은행 밖으로 넘쳐나 경기회복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낙수효과를 위한 일종의 ‘융단폭격(목표물을 겨냥하지 않고 일정 지역에 폭탄을 무차별 투하)’이다. 유감스럽게도 민간은행들은 보유금을 대출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갖고 있거나 주식 같은 금융자산, 이머징마켓 등에 투자했다. 덕분에 금융자산을 많이 가진 부유층의 소득은 올라갔지만, 일반 시민들의 살림은 여전히 곤궁했다. 양적완화로 엄청난 돈을 풀었는데도 소비·투자는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고, 물가인상률도 저조한 채로 남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한진해운 본사 로비에 설치된 컨테이너선 조형물. 해운업계는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선진국형 양적완화’와 대비하면 이른바 한국형 양적완화의 특이성이 드러난다. 우선 한국의 기준금리(정책금리)는 5월 초 현재 1.5%로 0%가 아니다.

또한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매입한 것은 이미 유통 중이던 국채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구입할 국채(정부가 보증하는 국책 금융기관의 채권이므로 사실상의 국채)는 유통 중인 상태가 아니다. 당초부터 한국은행에 매각해서 정책 자금을 확보할 계획으로 발행한 국채다. 발행 즉시 한국은행에 팔게 되어 있다.

한편 한국형 양적완화는 기업 구조조정과 ‘주택담보대출 가구 지원’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조준하고 있다. 선진국형 양적완화가 ‘융단폭격’이었다면 한국형은 ‘조준폭격’을 지향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미국이나 일본처럼 ‘무차별적 양적완화’가 아닌 ‘선별적 양적완화’ 방식이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렇게 보면, 한국형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정도가 선진국보다 훨씬 심하다. 한국은행이 정부의 공공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바로 찍어서 바치는 격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양적완화처럼 기껏 찍어낸 돈이 금융기관의 금고 속에 처박혀 있거나 금융자산 매입에만 사용될 위험성은 적다. 그 돈은 기업 구조조정과 주택담보대출 가구 지원을 통해 실물경제로 흘러가게 된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극좌파로 불리는 영국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의 간판 프로젝트인 ‘민중에 대한 양적완화’와 외형상 매우 유사하다(한국형 양적완화=코빈식 양적완화? 참조).

양적완화라기엔 터무니없는 규모

그런데 한국형 양적완화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양적완화라고 부르기에는 그 규모가 어이없을 정도로 작다. 현재 전문가들은 조선업과 해운업 등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양적완화 규모를 5조~10조원으로 예측한다. 주택담보대출 문제에 투입할 자금을 20조원까지 잡아도 모두 25조~30조원 정도다. 이에 비해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의 총자산은 양적완화 직전인 2008년 10월 9000억 달러에서 양적완화가 종료된 2014년 10월에는 4조5000억 달러로 폭증했다. 연준이 6년 동안 매년 평균 6000억 달러(양적완화 이전 자산 9000억 달러의 67%) 규모의 국채와 다른 채권을 사들였다는 이야기다. 일본은행의 총자산 역시 양적완화에 따라 2012년 말의 156조 엔에서 3년 뒤인 지난해 말의 383조 엔으로 227조엔 증가했다. 이에 비해 한국형 양적완화로 조달할 금액(25조~30조원)은 한국은행 총자산(489조원)의 5~6%에 불과하다.

사실 이 정도의 금액이라면 양적완화 같은 거창한 용어를 갖다 댈 필요도 없다. 이미 박근혜 정부는 2014년 최경환 경제팀 출범 당시 내수활성화를 위해 각종 재정보강책으로 40조원 정도를 푼다고 발표한 바 있다. 지난해 6월에도 메르스 여파로 내수가 위축된다며 11조5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기존 제도를 확대하는 것만으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을 굳이 양적완화로 마련하겠다고 수선을 떤 이유는 무엇일까? 선거운동 국면에서, 모호하기 짝이 없는 양적완화라는 개념으로 ‘장난’친 게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의도가 어떠하든 ‘한국형 양적완화’ 논쟁 과정에서 제시된 방향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업 구조조정, 가계부채, 디플레이션 공포 등에 대처하려면, 현재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적 자금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해운·조선업 구조조정이 한국 사회의 큰 현안으로 떠올랐다. 4월27일 관련 업종 노조 관계자들이 금융위원회 앞에서 구조조정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더불어민주당 홍종학 의원이 경제개혁연대로부터 제공받은 ‘재벌기업 부실 징후’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 48개 가운데 23개 그룹의 부채비율이 200%를 초과했다. 그중 10개 그룹은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경제 상황은 이후에도 계속 악화되었다. 대우조선·현대상선·한진해운 이외에도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계속 늘어날 수 있다.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 역시 현재 예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다. 재정정책(예컨대 증세)만으로 조달하기 힘든 정도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런 우려가 현실화되어 기업들의 부실화가 연쇄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을 서두를 필요도 있다. 양적완화가 하나의 자금 조달 옵션으로 남는 이유다.

야권에서는 대체로 ‘한국형 양적완화’를 ‘부실기업을 살려 재벌 가문에 이익을 주는 수단’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공적자금을 투입받는 부실기업의 대주주(재벌 가문)에게 정확히 책임을 묻는 ‘시장주의 원칙’만 관철할 수 있다면,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 공적자금을 받아야 할 정도로 기업을 망쳐놓았다면, 대주주의 지분은 대폭 축소되는 것이 마땅하다. 또 대주주의 의지를 반영해온 경영자는 퇴진해야 한다. 기존 대주주가 사라지면, 공적자금을 투입한 국가는 자연스럽게 최대 주주로서 해당 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하게 된다. 결과적인 국유화다. 유능한 경영자를 새로 선임해서 기업을 살린 뒤 다시 민영화하면 그만이다. 공적자금이 재정이나 양적완화 중 어떤 수단으로 조달되었든 상황은 동일하다.

야권에서는 ‘한국형 양적완화’가 특정 산업의 특정 기업에만 투입된다거나,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공적자금이 긴요한 산업부문에 투입된다는 것은 오히려 장점일 수 있다. 선진국들처럼 ‘융단폭격형’이 아니라 ‘조준폭격형’ 양적완화라면 그 혜택을 금융기관과 부유층뿐 아니라 전 사회(실물경제)에 배분하는 효율적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형 양적완화가 영국 노동당의 ‘민중에 대한 양적완화’처럼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치명적으로 침해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다른 사회적 가치들보다 훨씬 우월한지는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구조조정 자금 얼마나 필요한지 먼저 판단해야

수출 문제도 있다. 한국과 수출 시장에서 경합하는 일본의 중앙은행은 연간 80조 엔 정도의 채권을 사들인다. 그만큼의 엔화가 방출된다는 소리다. 이에 따라 엔화의 가치가 폭락해 한국의 수출경쟁력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물론 금리 인하로 원화 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대포’에 ‘물총’으로 대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양적완화는 국제사회에서 ‘환율 조작’이 아니라 ‘국내 통화정책’으로 통할 수 있다. 일본이 그렇게 해왔다.

지금은 한국형 양적완화 논쟁보다 시급한 과제가 있다. 국내 산업들을 점검해서 어느 정도 규모의 구조조정 자금이 필요한지부터 가급적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일자리를 잃을 노동자들을 위한 일자리 대책과 복지정책, 이에 필요한 자금 규모도 함께 추산해봐야 한다. 그다음에 필요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 고민해도 늦지 않다. 큰돈이 들지 않는다면 재정정책의 틀 안에서 마련하면 된다. 그러나 재정만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이 필요하다면, ‘조준폭격형’ 양적완화를 ‘중앙은행의 독립성’ 같은 도그마 때문에 포기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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