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인 세르게이(가명)는 어린이날을 포함한 나흘 연휴가 지겹기만 했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는 밥벌이인 속눈썹 그리는 일을 하느라 반나절 나들이를 할 겨를도 없었다.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3평(약 9.9㎡) 남짓한 방에서 세르게이는 휴일 내내 뒹굴었다.

지난해 여름 한국에 온 세르게이는 러시아에서 온 난민 신청 아동이다. 심한 곱슬머리에 피부색이 살짝 검다. 러시아 백인인 엄마는 나이지리아 출신 아빠를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 뒤 아들을 낳았다. 미혼모로 혼혈아를 키우는 일은 일상의 모욕과 폭력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길 가던 청년들이 세르게이를 발로 차거나 ‘니그로’라고 놀리고, 엄마에게 심한 욕설을 해댔다. 급기야 어느 날 방화로 집이 불탔다. 살아남기 위해 이사를 거듭하다 모자는 한국행 비행기 표 두 장을 끊었다.

세르게이와 그의 엄마 같은 사람을 우리는 난민이라 부른다. 여러 이유로 박해를 받아 본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이다. 지난해 세 살배기 시리아 꼬마 난민 아일란 쿠르디가 터키의 해변에 얼굴을 묻은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돼 지구촌을 울린 적이 있다. 한국에서 난민은 국제 뉴스로 듣는, 강 건너 불 정도로 여겨지지만 한국은 난민들이 선호하는 나라가 되었다.  

지난해 말까지 한국에 난민 인정을 신청한 사람은 총 1만5000여 명. 세르게이와 같은 아동 난민 신청자도 600여 명이 된다. 2013년부터 매년 두 배가량 증가해 올해는 연 1만명이 되리라 예상된다. 이제는 해외 뉴스가 아니라 나라 안의 현안이 된 것이다.

생명·안전·자유를 찾아온 난민들에게 한국은 어떤 땅일까? 한 난민 지원 활동가는 “도움을 요청하는 국제전화를 받을 때마다 괴롭다. ‘더 좋은 나라를 찾아보고 정 갈 곳이 없으면 한국으로 오라’고 조언한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난민들은 궁핍과 차별, 무관심과 불안정한 삶으로부터 큰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힘든 삶은 난민 아동의 가녀린 어깨 또한 비껴가지 않는다. 난민 부모가 한국에서 낳은 아이는 신분이 없는 무국적자가 된다. 한국 정부가 출생등록을 받아주지 않고, 본국 대사관을 찾아 등록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국적 없는 아이는 학교를 가기도 힘들고, 의료 혜택을 받을 수도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는 생겼지만 실제로 학교장의 재량이 커서 종종 폭탄 돌리기 대상이 된다.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솔로몬(가명)은 집 옆에 학교를 두고 1시간 거리의 학교를 2년이나 다녀야 했다.

학교에 가면 난민 아동의 한국어 실력은 쑥쑥 늘지만 여러 문제에 직면한다. 은행 통장이 개설되지 않아 스쿨뱅킹을 이용하지 못해 번번이 지적당하거나 여러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난민 아동들은 부평초 같은 신세임을 깨달아간다. 언어폭력이나 은근한 왕따는 일상으로 겪는다. 고학년이 되면 공부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한국말이 서툰 부모에게 알림장은 난수표다. 주위에 물어볼 한국 사람도 없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이 이웃 없이 산다는 것은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존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난민은 정부의 ‘방과 후 공부방’ 비용이나 보육비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돈이 없어서 공부방에 못 보내기 일쑤다. 난민 여성들은 아이를 돌보느라 일자리를 가질 수 없다.

유엔 설립 후 최초의 구호 대상은 ‘한국전쟁 난민’

그래도 난민 아동들은 한국이 좋은 나라이고 살고 싶은 나라라고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엔젤(가명)은 “나는 한국인이며 엄마 나라(파키스탄) 사람이 아니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열한 살 때 미얀마를 떠나 14년째 한국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 마리아(가명)는 올해 4년제 간호대학의 졸업반 학생이 되었다. 중2 때부터 줄곧 반장을 도맡았던 그녀는 ‘간호사가 되어 이웃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런 아이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또다시 그들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일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난민 아동들은 이미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우리의 아이들이며, 깨물면 똑같이 아픈 손가락이다.

한국에도 결식 아동이 있고 북한에 엄청난 난민 아동이 있다는 항변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 항의를 하는 사람들한테 유엔이 설립된 뒤 최초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으로 인한 한국 난민이었음을 알려주고 싶다. 이제는 받은 것을 돌려줄 뿐 아니라 자유와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는 세계인과 함께할 때가 되고도 남았다.

기자명 문경란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전 서울시 인권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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