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광무 2년, 즉 1898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어. 갑신정변이나 을미사변처럼 시험 출제율 높은 사건들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런 사건들에 못지않을 정도의 중대한 움직임이 벌어졌지만, 결국 좌절되어버린 한 해였다고나 할까. 수천 년간 나랏님 시키는 대로 농사짓고 세금 바치고 부역하고 군대 갔던 양순한 백성들이 자신들의 뜻을 모으고 시위로 정부를 압박하며 나라의 앞길을 열정적으로 토로하는 일이 벌어졌거든.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의 정체는 만민공동회였다.

1898년 3월10일, 서울 종로 거리는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부산했어. 단발에 양복 입은 개화 신사부터 아직 상투에 갓을 버리지 않은 사람, 머리를 땋은 소년 등 각양각색의 인파가 종로 거리로 몰려들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20만명을 밑돌았다. 그런데 종로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가 1만명을 넘어섰어. 요즘으로 치면, 서울 인구 1000만명 잡고 50만명이 종로를 뒤덮었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러시아 놈들에게 나라를 내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우렁차게 연설을 시작하자 종로 바닥은 그대로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난무하는 집회장이 됐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피했다가 돌아온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는 했지만, 왕이 황제가 되고 왕국이 제국으로 불린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지. 열강들은 ‘국왕 전하’ 대신 ‘황제 폐하 감사합니다’를 부르짖으며 대한제국의 이권을 뜯어갔으니까. 이에 서울 시민들이 반항하고 나섰던 거다. 모임의 의장은 현덕호라는 쌀장수였지. 젊은 날의 이승만 등이 열변을 토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구호를 외치면서 제국의 ‘신민(臣民)’이 아닌 나라의 근본인 인민(人民)이 되어갔단다.

ⓒ위키백과경운궁 대안문(지금의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인 보부상들. 이들이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고종 황제와 친러파 정부, 그리고 대한제국을 세계 최고의 ‘호구’로 알던 외국인들이 보기에 이 만민공동회 사태는 그야말로 “한국 백성이 달라졌어요”였어. 경복궁 깊숙이까지 들렸을 시민들의 아우성 가운데서, 대한제국 정부는 ‘절영도를 조차해달라’는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하게 된다. 기세를 올린 서울 시민들은 연일 토론회를 열며 자주독립의 미래를 열변에 실었다. 그해 10월1일에는 근대적 법 제도의 실시 및 간신배 퇴진을 요구하는 장장 12일 동안의 덕수궁 앞 철야 시위가 벌어졌어. 고종 황제는 또 한 번 물러선다. 박정양·민영환 등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내각을 출범시킨 거야.

이 관료들까지 참석한 ‘관민(官民)공동회’의 개막 연설자는 당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백정(白丁) 박성춘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전만 해도 도성에 출입하기도 어려웠을 박성춘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어.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지만, 많은 장대를 합하니 그 힘이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國運)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헌의 6조(관민공동회에서 결의된 6개 항의 국정개혁안)’니 뭐니 하면서 자신이 누려온 임금으로서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고종의 신경도 꽤 날카로웠을 거다. 그런 마당에 백성들이 공화국을 세우고 아무개 대신을 대통령으로 삼으려 한다는 헛소문까지 들려왔지. 결국 고종 황제는 만민공동회를 짓밟을 결심을 하게 돼. 그 앞잡이 노릇을 한 단체가 바로 황국협회였다.

황국협회는 물건을 이고 지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장사하던 ‘장돌뱅이’, 즉 보부상들의 조직이었어. 보부상들은 정부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대가로 활동상 특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황국협회가 조직될 때 황태자(이후의 순종)는 돈 1000원을 보내 격려했다. 사실 황제의 뜻이었겠지. 고종은 ‘헌의 6조’를 받아들이는 체하다가 황국협회를 출동시켰다.

원래 보부상들은 군대에 비견될 만큼 단결력과 조직력이 뛰어난 조직이었어. 이들이 마치 전쟁을 하듯 물푸레 방망이를 들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한 거야. 시민들은 피를 흘리고 쓰러지면서도 관제(官製) 폭력배들에게 저항했다. “일반 농민, 나무꾼, 종로의 시전상인, 기생과 찬양회를 중심으로 한 여성, 심지어 걸인과 아이까지” 분연히 종로 거리에 집결하는 감동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대한제국의 희망이 가장 거세게 타올랐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 그러나 황제는 백성들의 희망에 줄곧 찬물을 뿌려댔다. 황제는 밥과 국물을 하사해서 관제 폭력배로 전락한 보부상들의 배를 채워주었지. 황실이 보부상들에게 은밀하게 쥐여준 은덩이는 집요하게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는 ‘군자금’ 노릇을 했어. 이런 보부상들의 난동과 군대까지 동원한 황제의 완강함 앞에 만민공동회는 결국 해산하고 말아.

ⓒ시사IN 조남진2011년 7월19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

관제 폭력배·어용 시위대의 끈질긴 역사

어쩌면 대한제국은 이때 망했는지도 몰라. 권력자가 자신의 탐욕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의 요구를 분쇄했잖아. 더욱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또 다른 백성들을 적대하며 공격하라고 시켰다. 이 순간, 대한제국이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은 이미 사라졌던 것이 아닐까? 고종 황제는 각국 공사관에 “이놈들(만민공동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질의하기도 했다. 가장 열렬하게 “군대를 동원해서 본때를 보여주세요!”라고 외쳤던 이가 한반도에 큰 야욕을 가졌던 일본의 공사라는 건 무얼 뜻하겠니.

이런 관제 폭력배들, 어용 시위대의 역사는 지긋지긋하게 끈질기다. 1952년 전쟁판의 임시 수도 부산에서는 백골단이니 땃벌떼니 하는 정체불명의 깡패 집단들이 “국회가 민의를 무시한다”라면서 폭력을 휘둘렀다. 심지어 국회를 포위하고 위협하기도 했어. 당시 헌법으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게 돼 있었다. 문제는, 이 제도하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재선될 가능성은 전무했다는 거였지. 그래서 이승만은 개헌, 즉 제도를 바꾸기 위해 깡패들을 동원해 국회를 압박했던 거야. 역시 나랏돈으로 고깃국 먹이고 돈푼이나 손에 쥐여줬겠지. 깡패들을 부산에 풀어놓은 뒤 이승만이 국회에 보낸 서한은 이렇단다.

“국회에서 민의를 너무 무시하고 한도에 넘친 권리를 사용하다가 민중이 공분을 참지 못하여 대다수의 각 군·도 정식 대표들이 경무대에 와서 국회 해산을 요청하고 있는 터이므로 대통령은 대표들을 대하여 며칠만 허락하면 순리로 해결되기를 시험해보겠다고 하고 책임을 맡아 국회의원 제씨들에게 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니….” 자기가 조직한 깡패들의 뜻을 민의로 둔갑시키고 그것을 근거로 국회를 협박하는 대통령.  

그리고 그로부터 60년도 넘게 흘러 21세기가 된 오늘, 아니 만민공동회 시절로부터는 무려 두 번의 육십갑자 가까이 흘러간 2016년 4월에 아빠는 새롭게 부활한 어용 깡패들의 면모에 허탈해지는구나. 자그마치 청와대 행정관께옵서 진두지휘하시고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참모 본부라 할 그 이름도 금빛 찬란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관제 시위꾼 조직의 이름은 ‘대한민국어버이연합’.

그래도 120년 전의 깡패들은 황국(皇國)을 논했고 60년 전의 양아치들은 백골단이니 땃벌떼니 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낼 줄이나 알았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 정부와 전경련은 돈 2만원이 아쉬운 노인들을 앞장세웠구나. ‘어버이’의 휘장을 드리운 채 ‘빨갱이들 죽여라’ 악다구니치는 노인들 뒤에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점잖게 육갑들을 하고 있었구나. 저 노인들에게 황국협회원들의 물푸레나무 방망이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백골단처럼 덩치 좋은 깡패들이 아니라 허약한 노인네들에 그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아빠는 분간이 서질 않는다. 요즘은 네게 역사 얘기를 들려주기가 겁난다. 네가 살아가야 할 나라는 이런 나라여서는 안 되는데.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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