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3월2일, 비무장지대의 차가운 땅에도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바람은 평화로웠다. 경기 파주 대성동초등학교 아이들 다섯 명의 배움이 시작되는 입학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운동장에는 여느 곳과 다를 바 없이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맑게 갠 봄 하늘에는 태극기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북쪽 하늘에는 붉은 별이 선명한 인공기가 나부꼈다. 불과 몇백m를 두고 똑같이 봄바람에 펄럭이는 두 개의 ‘국기’가 현재진행형인 분단의 엄혹한 현장임을 말없이 일깨울 뿐, 사람과 자연의 표정은 여느 곳과 다를 바 없었다.

대성동초등학교는 비무장지대에 있는 유일한 학교다. 북쪽으로 400m쯤 걸으면 군사분계선. 그곳에서 다시 그만큼 더 가면 북한의 최남단 민간인 거주지 기정동이 나온다. 개성까지 11㎞ 남짓이다. 북한이 정말 코앞이다.

대성동초등학교에서 학교 밖 나들이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거주민을 제외하고는 교직원도 학교 담을 넘을 수 없다고 했다.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학교 밖으로 ‘이탈’하는 경우, 불과 몇m 학교 밖으로 또르르 굴러간 공을 주우러 가는 것도 공식적으로 금지된 행위라고 했다.

들에 일 나가는 농부의 트랙터 뒤에 자동소총을 멘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따라간다. 톨스토이 소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농부는 무장 군인과 짝지어 다닌다. 군인은 농부의 ‘농사일’을 무장 엄호한다.

ⓒ박해성 그림

비무장지대 남과 북 사이에는 생각처럼 벽 같은 물리적인 경계 시설물이 없었다. 그냥 산과 들, 나무와 시냇물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자연물 사이에 결코 넘을 수 없는, 넘어서는 안 되는 인간이 그어놓은 ‘선’의 존재는 섬뜩하게 날카로웠다.

평화로운 삶의 감수성을 내면화할 경험이 없다

2016년 초,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촉발된 한반도의 날선 긴장과 대치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한반도의 심각한 안보 상황에 대한 불감증을 개탄하기도 하지만, 드러내놓지 않을 뿐이지 내면의식 속의 불안마저 ‘불감’은 아닐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 모든 폭력의 근원에 ‘휴전 상태’인 한반도 냉전 상황이 있다고 생각한다. 흉포한 범죄뿐 아니라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학교폭력 등도 근본적으로는 오랜 냉전과 분단이 빚어낸 불안과 증오의 부산물이 아닐지 의심한다. 군사나 외교 문제에 대한 안목이 없는 나로서는 한반도의 핵 위험과 전쟁 불안 못지않게, 전쟁 위험이 양산할 우리 사회와 교육의 만성적 폭력이 참으로 위태롭고 두렵다.

우리에게 ‘평화’라는 단어는 ‘평화를 위한 전쟁과 폭력’이라는 역설이 강하게 조각된 단어다. 수십 년간 분단과 냉전이 지속된,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불안한 국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 결코 평화로울 리 없다.

2013년 여성가족부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절반에 가까운 46%의 아동·청소년이 가정에서 폭력을 당하거나 부모가 휘두르는 폭력을 보면서 자란다고 한다. 기성세대가 갖고 있는 불안과 분노, 그리고 답습된 폭력 불감증이 사회적 유전자로 전이되는 양상이다.

사회뿐 아니라 학교와 교실 또한 이러한 환경에서 자유롭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우리 아이들이 영리하지만 외국 아이들에 비해 훨씬 더 경쟁적이고 공격적이라는 것이 외국 학교를 방문해본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평화로운 삶의 감수성을 내면화할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는 반평화적 상황이 우리 아이들을 반평화·반인권적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자괴감을 나는 버릴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의 뿌리에 한반도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있다.

남북관계 회복과 동북아 평화는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다. 우선 당장 대성동초등학교 아이들이 전쟁의 두려움을 벗고 마음껏 학교 안팎을 오가며 ‘평화’롭게 공부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폐쇄된 체제 안에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가엾은 북한 아이들의 삶을 다독이는 일이다.

헌법 제3조의 영토인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은 도대체 언제쯤 전쟁의 위험이 사라진 세상에서 트라우마를 겪지 않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기자명 안순억 (성남 운중초등학교 교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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