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우 편집국장
제국주의든, 군부 독재든 독재 권력이 가진 속성은 다 같다. 먼저 언론을 휘어잡은 다음 문화를 말살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 그 선봉에 서는 것은 다름 아닌 휘어잡힌 언론이다.

유고에서 내전이 발발하기 전 그곳 사람들은 서로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조차 의식하지 않고 사이좋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은 기독교계니 이슬람계니 하며 나뉘어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유고 사람들을 내전으로 몰아간 것은, 권력에 눈이 어두운 각 종파 지도자들의 조종을 받는 라디오 방송들의 터무니없는 흑색 선동이었다. 내전이 끊일 날 없는 검은 아프리카에서도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선량한 사람들을 잔인한 살인마로 만드는 것은 바로 독재자들이 운영하는 각종 언론 매체이다.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제국주의나 군부의 자리를 대체한 것은 자본이다. 과거의 독재자와 판이한 점이 있다면 자본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겉모습은 화려하고 세련됐다. 하지만 묘하게도 결과적으로는 제국주의 시대나 군부 독재 때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일간지 월스트리트 저널이 악명 높은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의 손으로 넘어간 데서 알 수 있듯이 전세계의 전통 있는 권위지들이 하나 둘 자본의 수중으로 떨어져간다. 자유언론의 대표 선수였던 프랑스의 르몽드·르피가로·리베라시옹의 지분도 상당 부분 재벌의 것이 된 지 이미 오래이다. 권위지의 쇠퇴는 문화의 후퇴로 이어져 전세계 출판계는 몇 년째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폭력은 사라졌지만 언론은 자본에 매였고, 문화는 뒷걸음질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계 사정이야 새삼 말할 게 없고 출판계 형편은 참혹할 지경이다. 수년째 베스트셀러 자리는 일본 어린이 만화 번역본의 차지이다. 돈 버는 방법을 쓴 책을 안 내고선 출판사가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다고 한다. 매주 책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 처지에선 그저 모골이 송연할 따름이다.

가을이라 그랬는지, 얼마 전 YTN은 대선 주자들은 어떤 책을 감명 깊게 읽었을까 하는 뉴스를 내보냈다. 거길 보니 이명박 후보는 간디와 슈바이처 전기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정동영 후보는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권영길 후보는 〈미테랑 평전〉을 꼽았다고 한다. 어째 이분들에게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책을 안 읽었다는 냄새가 난다.

기자명 문정우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mjw2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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