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천 년 전 신라와 현재의 대한민국이 생동하며 공존하고 있다. 고대의 무덤 옆에서 플리마켓이 열리고,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들고 첨성대 근처를 산책하며, 신라인이 연회를 벌였던 연못가 별궁에서 ‘치맥’을 한다. 시민과 관광객들로 온통 북적이는 신라의 공간에서 아주 살짝 비껴나면,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그러나 사실은 매우 오랜 시간 경주를 지켜왔던 ‘조선’과 그 삶이 이어진 1900년대의 모습들이 남아 있다. 예 게스트하우스는 바로 그곳에 위치한다.

경주역에서 내리면 평범한 시내 풍경이 나타난다.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런데 조금 더 걷다 보면 건물 사이로 언덕과 같은 왕릉, 봉황대가 보인다. 한쪽에서는 플리마켓이 열리고, 다른 쪽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펼쳐놓고 담소를 나누고, 그 가운데 풀밭을 어린아이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젊은 부부가 사진을 찍는다. 이 오묘한 어울림을 보며 ‘아, 경주에 왔구나’ 실감한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발을 옮겨 ‘내남 네거리’를 건너면 주변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방금 전 활기에 찼던 모습과 달리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흐르는 공기도 느려진 듯하다. 좁은 2차선 도로변에는 단층짜리 낡은 한옥 지붕 집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오래된 간판을 단 절집이 군데군데 나타난다. 한참을 가도 물 빠진 듯한 색감의 옛 동네 풍경이 반복되고, 게스트하우스의 표지도 간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빨간 대문이 나타나면, 드디어 도착이다.

ⓒ강혜경 제공

집을 찾아오는 내내 차도 별로 안 다니는 좁은 도로에서 경적 소리 한번 들은 일 없이 적막했는데, 낮은 대문을 넘어 오래된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와 귀여운 강아지들의 손님맞이가 기분 좋은 백색 소음을 만들어준다. 빨간색의 낮은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그제야 집 안 한구석에 놓여 있는 이곳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 ‘예 게스트하우스’다. 한옥의 예스러움, 예절(禮)과 예술(藝), 기쁨(豫), 그리고 영어의 ‘YES’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이란다. 그 의미들이 집 자체와 집안 곳곳의 오래된 가구와 장식품들에서 묻어난다.

이 집은 1937년에 지어졌다. 안채와 별채, 사랑채로 이루어진 ㄷ자형 구조를 리모델링해서 게스트하우스로 만든 건 2013년의 일이다. 별채에 가족실(4인실 1개, 3인실 2개) 3개와 도미토리(2인실 2개, 6인실 2개) 4개, 사랑채에 도미토리(6인실 1개, 10인실 1개) 2개 등 개별 숙박 공간이 있고, 안채에 식당 겸 부엌, 정보마당(PC 이용, 독서 가능) 등 공동 공간이 있다. 여름에는 옥상이나 마당에서 텐트를 이용한 숙박도 가능하다. 기본적으로는 공동욕실과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지만, 별채 4인 가족실의 경우 개별 화장실과 욕실이 딸려 있다.

쌀쌀한 밤, 주인장이 건넨 따뜻한 대추차 한 잔

집 구경도 마쳤겠다, 다시 빨간 대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앞에 예 게스트하우스와는 다른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보인다. 바로 한옥 호텔 ‘황남관’. 호텔이니만큼 숙박비가 다소 비싸지만 고급스럽다. 숙박하지 않는 손님도 일정한 비용을 내면 한복입기 체험, 전통놀이 체험 등이 가능하다. 황남관을 지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교촌 한옥마을이다. ‘교촌’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향교가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 향학, 그 이전 신라시대에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이곳에 있었다. 그 향교와 함께 유명한 경주 최 부잣집의 고택 등 조선시대의 전통 한옥들이 잘 복원돼 있다. 다도와 누비, 토기 등의 체험교육도 가능하다. 혹시 시간이 더 있다면 차를 타고 30분여를 달려 양동마을에 다녀와볼 일이다. 조선시대 전통문화며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현존 최대 규모의 마을로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곳곳을 산책하며 풍광과 문화재를 느긋이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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