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려면 다리보다는 마음이 더 튼튼해야 한다.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려 버스로 20여 분. 경부선 대구역이나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서 출발한다면 걸어서 10여 분. 길은 크게 어렵지 않지만 찾아가는 내내 ‘설마 이런 곳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을까?’ 하는 의심과 싸워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판 게스트하우스가 자리한 북성로는 원래 공구상이 모인 골목이다. 시내 중심가인 동성로와 지척에 있으면서도 대구 시민들조차 잘 모르는 곳이다. 그 의심을 걷어내면 골목길 사이로 ‘판’이라는 작은 간판이 고개를 내밀어 방문객을 반긴다.

세상의 변화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건 오히려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일제강점기 적산가옥 두 채 사이에 끼어 있는 이 한옥이 지난 2013년, 손미숙씨(56)의 눈에 띄었다. 록음악이 대세이던 젊은 시절, 우연히 접한 재즈 음악은 이후 해외에서 전업주부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줄곧 손씨의 삶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국으로 돌아와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을 때도 그랬다. 100여 년 전 야마구치 도기점의 창고로 쓰였던 일본식 건물은 재즈바로 탈바꿈했다. 이웃한 한옥과 적산가옥은 각각 게스트룸과 도미토리룸이 됐다.

ⓒ양정민 제공

건물 3채가 나란히 붙은 작은 공간이지만 그 속에서도 세월의 더께가 느껴진다. 한옥 앞마당에 널린 바윗돌 중에는 조선 시대에 대구읍성 자재로 쓰였던 돌이 일부 섞여 있다. 손씨는 ‘한옥에 왔으면 구들장에 몸을 지지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겨울이면 아궁이에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한다. 직접 고가구점에서 발품을 팔아가며 구입해왔다는 재즈바 안의 수납장은 100년이 넘어 손때가 반들반들하다. 도미토리는 적산가옥의 높은 천장 구조를 그대로 살렸고, 침대에는 다다미를 깔아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판 게스트하우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구경거리가 또 하나 있다. 게스트하우스 정문에 놓인 그네에 앉아서 담장을 바라보면 푸른 바탕의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피티 전문가인 재일동포 손님이 지난겨울 강추위 속에 직접 물감을 공수해가며 남기고 간 그림이라고 한다. 이 벽화는 담벼락 뒤로 보이는 ‘최제우 나무’를 그려낸 것이다. 400살이 넘은 이 회화나무는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경상감영(현재의 종로초등학교 자리)에서 옥고를 치르는 것도 지켜봤을 터다.

‘대구 근대 골목 투어’의 출발지로 안성맞춤

판 게스트하우스 안의 재즈바는 잠시 운영을 중단했다. 서울에서 연주자를 모셔오는 노력도 마다않고 2년간 매주 공연을 이어갔지만 대구에 재즈 마니아가 많지 않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혔다고 한다. 라이브 음악은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재즈 CD를 재생하자 비로소 이 공간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천장이 높은 일본식 목조건물은 그대로 하나

ⓒ양정민 제공

의 울림통이 되고, 한옥 툇마루에 앉아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을 듣고 있자니 가장 동양적인 공간에서 가장 서구적인 음악을 듣고 있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묵혀두기에는 아까운 공간이다. 곧 낮에는 식당, 밤에는 재즈 공연장으로 다시 태어날 계획이라고 하니 재즈 드럼 소리가 ‘판’을 찾는 이들의 심장을 쿵쿵 울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게스트하우스 안에서는 제공되는 조식 이외의 음식물은 반입이나 조리가 금지돼 있다. 또 방음에 취약한 한옥 건물 특성상 미취학 아동을 동반한 일행이 주말에 묵으려면 반드시 미리 문의를 해야 한다. 떠들썩한 파티를 원하는 단체 손님보다는 조용한 휴식을 원하는 소규모 손님에게 여러모로 알맞은 곳이다.

대구라는 도시 속 세월의 더께를 더 흠뻑 느끼고 싶다면 대구광역시 중구에서 선정한 코스를 따라 ‘근대골목 투어’(〈시사IN〉 제314·315호 별책부록 참조)에 나서도 좋겠다. 골목골목을 디뎌가며 옛사람들의 기억을 더듬고, 거기에 내 기억 하나를 올려놓고 나면 대구가 다시 보인다. 판 게스트하우스는 투어 1코스인 ‘경상감영 달성길’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어서 대구 여행의 시작점으로 잡기에도 알맞은 위치다. 또 걸어서 10분 거리 이내에 삼덕상회, 믹스카페 북성로 등 옛 건물을 리모델링한 카페며 공구박물관, 대구 근대역사관 등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하지만 한국의 근현대사가 낭만과 추억으로만 기억될 수는 없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가장 가까운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아픔을 되새기는 공간이다.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순악 할머니가 생전에 기부한 5400만원이 주춧돌이 되고, 시민 모금과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 더해져 김 할머니가 세상을 뜬 지 6년 만인 지난해 12월에 문을 열었다. ‘Blooming their hopes with you(당신과 함께 그들의 희망을 꽃피움)’라는 문구가 적힌 희움 의식팔찌를 구입한다면 당신도 역사관 건립에 큰 힘을 보태는 셈이다. ●

 

주소 대구 중구 경상감영길 43-11

홈페이지 http://pannguest.co.kr

체크인 오후 3~10시  체크아웃 오전 11시

조식 제공 식빵·달걀·버터·딸기잼·녹차·믹스커피

주인장이 추천하는 곳 동화사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구름에 둘러싸인 팔공산의 능선이 아름답다. 하산 후에 먹는 찹쌀수제비와 막걸리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

20자평 재즈 선율처럼 달콤쌉쌀한 대구의 근대를 느끼자

기자명 양정민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