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은 특정한 목표를 수행하려고 사람들이 모인 결사체다. 정당 조직의 목표는 집권이다. 이윤이 목표인 기업 조직과는 다르다. 하지만 “어떤 요소가 조직을 유능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은 성격이 판이한 두 조직 모두에 적용해볼 수 있다.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은 금융권 전문경영인으로 기업 조직을 운영해본 사람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제안으로 정책 개발 ‘자원봉사’를 했다. 김 대표와 수시로 호흡을 맞추며 선거를 수행하는 정당 조직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4월20일에 만난 그는 선거 직후 앓은 감기로 여전히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직 운영자의 관점에서 한국의 정당을 진단해달라는 질문에는 인터뷰 시간 100분을 채우다 못해 요지를 정리한 이메일까지 추가로 보내왔다.

ⓒ시사IN 조남진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사진)은 4·13 총선에서 정책 개발을 맡았다. 더민주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제안으로 입당했지만, 총선에는 불출마했다.

제1당은 예상 못했을 것 같다.
얼떨떨하더라. 선거전 와중에 김종인 대표가 ‘사나흘 안쪽 분위기에 따라 움직이는 부동층이 굉장히 많아서 5% 정도는 얼마든지 바뀐다’ 그러더라. 근본적으로는 우리나라 유권자가 정당 일체감이나 지지 성향의 일관성이 강하지 않고,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적 선택지의 질이 썩 좋은 것도 아니니까. 그러다 보니 돌발 이슈나 마지막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

기업 경영자 관점에서 정당 시스템에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한국 정당에는 있어야 할 세 가지가 안 보였다. 고객 조사, 상품 R&D, 거버넌스(governance).

하나씩 짚자. 유권자가 고객인 셈인데, 고객 데이터 관리 수준이 어떻던가?
단순지지도 말고는 거의 없다. 몇 개 테마별로 던져봤을 때, 예를 들면 정권심판론과 경제실정 심판론 중에 뭐가 더 반응이 오는지 물었을 때 반응이 어쨌다 정도. 그것도 대개 ARS 조사다. 전화면접 조사나 포커스 그룹 인터뷰는 없고, 패널 추적 데이터도 없다. 지지자가 왜 이 당을 지지하고 그들에겐 어떤 이슈가 중요한지, 무당층에 중요한 이슈가 뭐고 무엇을 하면 지지자로 끌어올 수 있을지 정보가 없다. 그런 정도의 데이터만 가지고 선거 기획을 하는 걸 보면서 야, 어떻게 저렇게 하나 싶더라. 다음으로 상품에 대한 R&D 기능이 없다. 상품 R&D에 해당하는 게 정책 개발인데….

이번 총선 때 맡은 역할이 그 대목 아닌가?
정책도 사실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고객 분석에 기초를 둬서, 어느 대목을 사람들이 아프게 느끼는지, 반응을 강하게 하는지, 무엇을 우선순위로 생각하는지 조사하고, 정책을 만들었을 때 유권자들의 반응은 또 어떻게 다른지 추적해야 한다. 그러면서 정책을 만드는 거다. 지금은 그냥 만들자마자 갖다 지르는 꼴이다. 상품으로 치면 프로토타입(시제품)이 없다고나 할까. 여당 정책은 공무원이나 국책연구원에서 베껴온다. 야당은 시민단체 같은 데서 빌려온다. 정당이 정책을 개발하는 기능 자체가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거 같다.

지금 입법부 구조는 정책 생산 기능이 중앙당보다는 각 의원실로 분산되어 있다.
자원을 낭비하는 구조다. 예를 들면 (의원실에는) 보좌관 3명만 두고 나머지는 중앙당 정책위원회나 당 연구원에 배치해서 규모를 키우는 게 맞다. 청년 정치 지망생은 중앙당 정책 생산 부서에 둬서 훈련을 시키고, 거기서 두각을 나타내면 지역구로 보내고, 거기서 살아 돌아오면 지도자로 크고….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딱 그 사례다. 그런 시스템에서는 국회의원이 의원 입법을 내는 게 별로 없고 정책 생산 기능이 당으로 집중된다. 우리는 그게 아니다 보니, 법안 발의 숫자를 세서 의정활동을 평가한다는 난센스가 벌어지는 거다. 기업에서도 그런 계량적인 지표로만 인사 평가를 하면 조직이 이상해진다.

그런 정책 생산 프로세스에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나?
지속성이 전혀 없다. 의원실 보좌관은 언제라도 물러나는 임시직이다. 국회의원도 셋 중 한 명은 물갈이된다. ‘조직이 일을 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꾸준히 한다’는 의미다. 그래야 출렁거림 없이 조직에 뭔가가 계속 쌓이는 건데, 이 시스템은 그런 게 없다. 예를 들어보자. 김기식 의원, 국회 정무위에서 활동했고 그쪽 네트워크를 만들고 일을 굴렸다. 그 사람 20대 국회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이건 정책을 개발하고, 추진하고, 조정하고, 업데이트하고, 그런 일련의 관리가 불가능한 구조다. 그렇게 해놓으니까 막상 대선 때가 되면 당 밖에 있던 교수들이 우르르 모여서 자기들 평소 주장을 주르륵 늘어놓는다.

ⓒ연합뉴스1월15일 김종인 대표(왼쪽)가 문재인 전 대표의 삼고초려 끝에 더민주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정책의 스케일도 작아질 수 있겠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 공약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현행 건보료 부과체계는 자산 소유자나 자녀 잘 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이걸 우리 공약처럼 소득 기준으로 일원화하면 대략 93%가 이득을 보고 7%가 손해를 본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있다. 그런데 이 7%가 똘똘 뭉쳐서 기득권 수호에 나선다. 언론을 포함한 기득권이 적대시하지만 다수 국민에겐 이익인 정책이 있다고 치자. 전선이 자잘하게 쪼개져 있으면, 기득권의 방해를 돌파할 수 없다. 정책 생산 기능이 의원실 단위로 쪼개져 있으면 이런 핵심적인 문제가 안 풀린다.

어디서부터 답을 찾아야 하나?
일단 리더십이 제대로 서야 뭘 할 수 있다. 흔히 ‘감투병’이라고 말하는, ‘너 한 번 했으니 이번엔 나도 한 번 합시다’라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거버넌스가 망가져 있다. 이를테면 원내대표를 1년에 한 번씩 돌아가며 한다는 건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겠다. 감투 돌려쓰자는 취지 말고는 이해가 안 된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 격)이 1500명이라더니 우리 정당이 그 꼴이다.

김종인 추대론은 어떻게 생각하나?
추대라는 것은 어휘가 잘못된 거고, 전당대회를 통한 투표를 해야겠지. 거기에서 특별한 운동을 안 해도, 내가 하겠다고 표를 구하러 돌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이 투표로 그 사람을 뽑아주면 그게 일종의 추대인 것이고. 선거 결과에 의한 자연스러운 합의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데 이 동네는 그런 데가 아닌 것 같다.

이번 총선에서는 김종인이 외연 확장을 시도하는 동안 문재인은 핵심 지지층을 달래는 역할 분담이 등장했다. 이 양 날개로 대선까지 가는 게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은 길이라 보나?
그렇다. 하지만 계속 유지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안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인센티브가 다르다. 문재인 전 대표 쪽은 대선이 핵심 이해관계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또 다르다. 양 날개를 유지해줄 이유가 있을까?

김·문 연합은 충성 고객을 확보한 회사가 신규 고객을 잡으러 갈 때와 비슷한 구도인데?
기업에서도 굉장히 고민스러운 순간이 그럴 때다. 대표적인 사례가 충성 고객한테는 해주지 않는 할인을 신규 고객에게 해준다거나. 마케팅 쪽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기존 고객이 모르게 신규 고객에게만 할인해줄 수 있을까 하는 거고…. 그럴 때 경영적 판단을 위해 중요한 것은 기존 고객 이탈률이다. 이탈률이 높다면 기존 고객에게 제공할 가치를 다시 고안할 필요가 있고, 아니라면 굳이 (기존 고객을) 챙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거다.

이번 총선은 어땠나?
바로 그 핵심 데이터, 이탈률을 알기 위해서도 패널 추적 자료가 필요하다. 어떤 투표 경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이탈했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다들 감으로 말하는 거지. 그러면 자기 듣기 좋은 이야기대로 판단하게 된다. 데이터가 없으니까. 김종인 대표는 캠페인 도중에도 전국의 자기 인맥을 통해 분위기를 계속 체크하고, 아예 한 사람을 일종의 암행어사처럼 풀어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분위기가 어떻고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직접 보고받더라. 어찌 보면 조선시대 방식인데, 그런 식으로라도 기류를 읽는 것 말고는 별 방법이 없었다.

ⓒ연합뉴스더민주 이용섭 총선정책공약단장이 3월28일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이 부단장인 주진형 전 사장.

문재인 전 대표의 호남행이 효과가 있었는지를 두고도 김·문 양쪽이 이견을 노출했다.
그나마 신뢰할 만하다고 평가받는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호남의 지지도가 특별히 움직이지는 않았고 또 호남에서 실제로 사람들한테 물어 올라오는 얘기도 그렇다 보니, 김종인 대표는 그렇게 판단할 만했던 것 같다. 문재인 카드가 언론에 드러날수록 지지자는 신이 나겠지만 호남표에서는 네거티브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었고. 문 전 대표는 ‘지지자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다’였던 것 같다. 둘 다 자기 처지에서는 옳은 판단일 수도 있고. 그런데 그 이견이 선거 국면을 통해서 드러났다는 것은 아쉬운 장면이다.

문재인을 정점으로 한 주류의 지원이 없으면 김종인 체제 유지는 불가능하지 않나?
김종인을 데려온 사람은 문재인 전 대표니까, 김 대표가 대선까지 공정한 선거관리위 체제를 할 수 있도록 선도차가 길을 깔듯이 깔아놔야 하는데, 지금까지 선도차 역할을 썩 잘한 것 같지는 않다. 대표적인 게 비례대표 파동이다. 사회에서 봐도 무언가 일을 만들어내려는 사람은 그런 태도가 배여 있거든.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 미리미리 자잘한 변수까지 챙겨놓는 자세. 일이 안 될 때를 보면 대부분 사소한 변수를 미리 안 챙겨서 어그러진다. 비례대표 파동 때 문재인 전 대표가 사달이 나고 나서 뒷수습했는데, 그게 아니라 사전에 분위기를 조성해두는 게 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선도차 역할을 못했다?
초반에는 했다. 지도부 일괄 사퇴와 비대위원장 전권까지 문 전 대표가 정리를 해주고 빠졌는데, 그 뒤에 아무것도 안 한 거다. 김종인은 문재인 전 대표가 총선과 대선을 위해 뽑아든 카드지만 당연히 당내 기반은 전혀 없는 분이니 리더십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미리 변수를 정리하면서 가는 게 문재인의 이해관계에도 맞는 거다. 그걸 안 했으니…. 예우하느라 그랬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결과적으로는 오판이 되었다.

비대위에서 이른바 ‘칸막이 투표’로 중앙위 비례대표 의결권을 침해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김종인 대표가 넣은 사람은 자기를 포함해서 4명이다. 대표 권한으로 보장된 숫자다. ‘칸막이’의 경우, 김 대표가 ‘이러면 중앙위 가서 문제된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한 게 비대위 사람들이다. 자기들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한 비대위원들이 막상 중앙위 현장에는 2명만 나타나고, 난리가 날 때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안 하겠다고 버티다가 불려나온 김 대표는 거기서 “셀프 공천”이라고 비난을 받는데, 그 모욕감은 엄청났을 거다. 이것도 거버넌스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이다. 문재인 전 대표 처지에서는 전권을 넘겼는데 주변에 자꾸 얼쩡대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지만 선도차 역할까지 놓아버린 건 아쉬웠다.

노선과 방향에 대한 공유도 조직의 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산당처럼 지령 내리고 그런 게 아니라, 김종인씨가 당의 대표로 선거를 치러야 되니 비례 2번 하는 게 당연하다는 공감대를 왜 안 만들었을까? 나는 김종인 대표도 2번을 할 생각이었으면 미리 조율을 하는 게 맞았다고 본다. 내가 보기엔 김 대표는 영입 제안을 받을 때 ‘비례 2번’과 ‘당 대표’를 동시에 받았으니, 저쪽에서 당연히 작업을 해놓았을 거라고 오판했을 수 있다. 그게 아니고서는 양쪽 다 사전 작업이 너무 없었던 게 설명이 안 된다.

김종인·문재인 제휴가 총선 이후 삐걱거린다는 평가가 많다.
내 생각에, 정확한 진단은 아니다. 김종인 대표 처지에서 보자. 이 당에는 친문 세력만 있는 게 아니고, 대선까지 공정한 경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심이 어떻든 간에, 문재인 전 대표한테 운동장이 기울어지는 식으로, 한통속처럼 비치는 순간 대선 구도도 깨지고 당도 깨질 거라는 걸 늘 생각해야 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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