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대 0. 정당 투표 100% 새누리당 투표. 지역구 투표자는 170명. 정당 투표가 후보자 투표보다 7표 많음. 7표 실종.’ 4·13 총선 경남 진주갑 선거구 수곡면 투표소에서 생긴 일이다.

총선 당일인 4월13일 저녁, 진주 지역 투표함이 진주실내체육관 개표소로 모였다. 저녁 7시24분 수곡면 사전 투표함이 열렸다. 새누리당 박대출 후보 113표, 더불어민주당 정영훈 후보 42표, 무소속 이혁 후보 12표, 무효 3표가 나왔다. 지역구 후보가 득표한 총 투표수는 170표. 그런데 비례대표를 뽑는 정당 투표지는 177장이 나왔다. 7시47분 진주시선관위 개표위원장은 정당 투표자 모두 새누리당을 찍었다고 개표 상황표에 도장을 찍었다.

노동당 측 개표 참관인 심인경씨(43)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177 대 0이 말이 됩니까?” 심씨는 “처음에는 상식적 의심에서 시작한 문제 제기였다. 그런데 선관위 국장은 ‘다른 당을 찍었다는 증인이 나와도 법적 효력이 없다. 직접적인 증거 없이는 재조사가 무리’라고 했다”고 전했다. 진주시선거관리위원회는 “교차 투표(지역구 지지 후보와 비례대표 지지 정당을 다르게 선택하는 것. 정치학에서는 분할 투표라고 한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경남도민일보 제공경남 진주갑 수곡면 사전 투표함의 개표 상황표. 정당 투표지 177개가 모두 새누리당에 투표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문제없다’는 말로 모면될 상황은 아니었다. 4월18일 심씨와 진주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선관위가 파악한 분할 투표 현황 자료를 확보했다. 선관위 조사에 따르면, 수곡면과 이웃 명석면은 분할 투표율이 가장 적게 일어난 지역으로 나타났다. 선관위의 해명이 사실과 달랐다. 하지만 진주시 선관위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조사하지 못한다”라는 방침을 고수했다.

지역 언론사인 〈경남도민일보〉가 수곡면에서 사전 투표를 한 유권자를 찾아 나섰다. 그러자 정당 투표에서 새누리당을 찍지 않았다고 밝힌 유권자가 여럿 나왔다. 4월19일 〈경남도민일보〉는 인터넷판에 최소 3명의 유권자가 개표 결과와 다른 투표를 했다고 한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나는 새누리 안 찍었는데, 새누리 몰표가 나오다니”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 임종금 기자는 “더민주를 찍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국민의당을 찍었다는 사람도 나왔다. 분할 투표 때문이라는 말은 대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선관위가 더 잘 안다”라고 말했다. 〈경남도민일보〉 보도 이후에도 선관위는 “재조사 의향이 없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개표 부정 음모론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

하지만 다른 언론사들이 후속 보도에 나서자, 선관위는 4월20일 황급히 재검표를 진행했다. 재검표한 뒤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의 입장은 ‘문제없다’에서 ‘담당 직원의 실수였다’로 바뀐다. “담당 사무원의 실수로 인해 수곡면의 비례대표 투표지와 명석면의 비례대표 투표지를 함께 분류했다.” 당시 선관위 담당 직원이 수곡면과 명석면의 투표지를 구분하라는 지시를 했으나, 투표지를 분류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실수로 표를 섞어버렸다. 후에 정당별로 분류된 새누리당 득표 투표지 200매 묶음에서 23매를 제외하고 177표를 수곡면의 사전 투표 결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왜 하필 177장인지에 대한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관위는 수곡면과 명석면 각각의 사전 투표 집계는 잘못됐지만, 두 지역의 정당별 득표 합계는 같으니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선관위 조사는 이미 나온 숫자는 그대로 두고 그 숫자가 어떻게 나온 것이지를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선거 당일 개표 과정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투표 과정에서 결정적인 의혹이 발생했는데 이후 대처가 무능 그 자체였다. 지금껏 “문제없다”라고만 외치던 선관위 직원들에 대해서도 명확한 조사가 필요하다. 단순 실수라고 넘어가기에는 국가의 기본을 이루는 선거 시스템에 구멍이 너무 크다. 안 그래도 주요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개표 부정에 대한 음모론들이 일었는데, 이번 진주 투표소 사전 투표 몰표 의혹은 그런 음모론에 기름을 끼얹을 수도 있는, 그래서 선거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킬 우려가 큰 악재다.

선관위 발표 이후에도 의문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의문은 한동네 투표는 한 바구니에서만 계산되는데 왜 다른 동네 표가 섞였느냐는 것이다. 중앙선관위 한 관계자는 〈시사IN〉에 “행정구역에 따라 정확히 나뉜 상태에서 개표 상황표를 작성해야 하는데 수곡면과 명석면이 섞여버렸다. 전국적으로 다른 투표소의 표가 이렇게 섞인 경우는 이 지역을 제외하고는 한 곳도 없다”라고 말했다. 분류되기 전에 표가 섞였는데 새누리당 몰표가 나온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선관위는 정당 투표 177표와 지역구 후보 170표라는 7표의 차이도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7표는 기권이나 무효표라도 나왔어야 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연합뉴스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4월13일, 개표위원들이 투표함을 개봉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임종금 기자는 “재검표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선관위의 태도는 합리적이지 않다. 개표상황실 CCTV 검증이 없었고, 이후 투표함 관리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표 숫자가 맞으니 검증이 끝났다는 것으로는 부족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심인경 참관인은 “각 투표소 표가 어떻게 섞여버렸는지 검증이 우선이다. 그런데 섞인 과정을 확인할 수 없도록 재검표를 했다. 형사고발한다고 해서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지만, 고발을 논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2011년 10월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열렸다. 당시 최구식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의 수행비서 공 아무개씨는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장 비서관 등 고향 진주의 선후배들과 술을 마신 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박원순 후보 홈페이지를 디도스(DDoS·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했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투표소를 확인하고 투표하려던 사람들을 막기 위한 테러였다. 정부·여당 사람들이 국가기관을 공격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최구식 의원의 당시 지역구가 진주갑이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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