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난중일기〉는 뭐랄까, 참 무뚝뚝한 내용의 연속이야. 좋게 말하면 담백하고 절제된 무인(武人)의 글이지만, 일기에 털어놓게 마련인 감정의 토로나 내면의 고백 같은 건 그다지 보이지 않아. 하지만 이순신도 사람인지라 감정을 격렬하게 폭발시키기도 하지. 고향을 습격한 왜군에게 아들 면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그릇된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무르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허구한 날 날씨가 어떻고 활 몇 발을 쏘았고 누가 죄를 지어서 곤장 몇 대를 치고 어떤 놈은 목을 쳤다는 얘기가 태반인 〈난중일기〉지만, 이 대목에서만은 피의 비린내와 눈물의 짠맛이 난다. 아들의 죽음은 이 냉철한 무장까지도 속절없이 무너뜨린 거야.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각별한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해.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는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다. 둘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세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라고 쓴 바 있다. 실제로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엔, 서로 닮았든 그렇지 않든, 정답게 어우러지기보다 삐걱거리는 긴장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아들의 모든 면을 포용하는 어머니와는 다른 점이지. 그래서 세상에 어머니를 껄끄러워하는 아들은 별로 없지만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란다.

ⓒ안동대박물관6·10 만세 운동(왼쪽)의 총책인 권오설(오른쪽)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받다 숨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품는 부정(父情)이 어머니의 마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야. 어머니의 정이 항상 풍요롭게 흘러 포근하게 자식을 감싸는 강물과 같다면, 아버지들의 마음은 지하수처럼 저 아래를 유영하다가 기회가 닿으면 땅을 뚫고 솟구치는 간헐천 같다고나 할까. 안 그런 척 돌아서서 애달파하고, 의연한 듯 버틴 자세 아래에서 발 동동 구르고, 애써 무심한 척하다가 남이 안 보는 곳에서 ‘터지고’ 마는 게 아버지의 정일 거야. 그런 모습은 예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지.

이런 아버지들의 웅숭깊은 속내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가둬놓은 감정들이 거센 봇물로 터져 나오는 때라면 역시 자신의 팔다리 같은, 아니 심장 같은 자식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됐을 때일 거야. 위에서 말한 이순신처럼….

사연 많고 굴곡도 흔했던 우리 역사에는 이렇게 슬픈 운명의 칼에 빼앗긴 아들을 애통해하는 아버지들이 이순신 외에도 많았다. 그중 한 아버지로 일제강점기의 경상도 안동 사람 권술조를 들 수 있을 거야. 그의 아들은 권오설. 1920년대의 걸출한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권오설은 너도 익히 알 만한 역사적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바로 6·10 만세 사건이야.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은 경술국치 이후 흔적도 없이 살다가 1926년 세상을 떠났지. 독립운동가들은 그 장례식이었던 6월10일을 기해 과거 3·1 항쟁과 같은 반일 운동을 기획한다. 하지만 거사일을 며칠 앞두고 일본 경찰이 정보를 입수해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게 돼. 거사의 총책이라 할 권오설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조선공산당 2대 책임비서, 즉 당의 지도자였고 어기차게 항일 투쟁을 전개해왔던 권오설은 일본 제국주의엔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었다. 일본 경찰은 그야말로 악랄한 고문으로 권오설을 망가뜨려. 마침내 1930년 4월17일, 권오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짧지만 뜨거웠던 삶을 끝낸다. 서른셋. 안동의 명문 권씨 북야공파 35대손 권오설, 일제가 어떻게든 제거하고 싶어 했던 조선 청년 권오설은 이렇게 죽었다. 시골 선비였던 아버지 권술조는 아들의 참담한 죽음 앞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어른 두 명의 키를 넘는 길고 긴 종이 위의 제문(祭文)으로 남겼어.

ⓒ유경근씨 페이스북 세월호 희생자 오영석군의 아버지는 지난 총선 때 박주민 후보 당선을 위해 탈을 쓰고 춤을 추었다.

긴 제문(祭文)에 담긴 아버지의 피눈물

“내가 너와 인간 세상에서 부자(父子)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것이 겨우 33년인데, 이 33년 사이에 부자의 정을 나눈 것이 그 삼분의 일이라도 되었겠느냐. 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병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할 것이니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 사람의 삶은 올바름에 있는 것이니 네가 만약 죽을 자리에서 죽었다면 어찌하겠는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도리라 하겠으며 어찌 허물이라 하겠습니까. 원통하고 슬프도다.”(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2 〈권오설〉, 푸른역사 펴냄)

일제 당국은 만신창이가 된 권오설의 시신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처음부터 화장(火葬)을 하라며 시신을 내어주지 않더니, 장례도 양철로 만들어진 납땜한 관을 쓰라고 했다. 심지어 무덤도 만들지 말며 조문객도 받지 말라고 강요했어. 아버지는 절규한다. 마치 너도 아는 노래 ‘천 개의 바람이 되어’ 가사를 외쳐 부르듯이. “너의 밝은 혼령은 나를 따라왔느냐. 마루에 있느냐 뜰에 있느냐. 봄의 화창함을 만나 만물과 함께 변화하였느냐. 우레가 되고 천둥이 되어 원한과 노여움을 펼치려느냐. 온화한 바람이 되고 단비가 되어 못 물로써 광야로 흘러내리려느냐.” 그리고 다시 한번 아들의 혼을 더듬으며 인사를 남기지. “구천에서 서로 만날 날을 기다려다오. 이제 마음이 날로 약해지고 기운도 날로 줄어드니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으며 너와 더불어 회포를 풀 날도 반드시 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문의 제문을 쓰면서 아버지는 얼마나 울었을까. 먹물이 묽어질 만큼 피눈물을 벼루에 쏟지 않았을까. 독립운동이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고를 다 떠나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은 기나긴 제문의 글씨 하나하나에 서릿발처럼 배어 읽는 사람의 눈을 아프게 찌른다.

아빠는 지난 4·13 총선 결과를 보면서 너무 기뻤다. ‘그’가 당선되었거든. 아빠 친구냐고? 아니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야. 서울 은평 갑에서 당선된 박주민 후보! 세월호 유족들을 돕고 있는 변호사다. 그의 유세 과정에서 인형 탈을 쓰고 열심히 춤을 추면서 지지를 호소한 자원봉사자 중 몇 분은,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빠져나오지 못했던 아이들의 부모라고 한다. “환자를 직접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고, 환자들이 즐겁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힘쓰는 일이 훨씬 보람이 있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의사도 아닌 간호조무사, 환자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꿈꿨던 착하디 착한 소년 영석이 아버지도 탈을 쓰고 춤을 추었지.

혹여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게 선거에 누가될까 봐, ‘세월호 점령군’이라는 기막힌 악선전을 해대는 상대방 후보에게 악용될까 봐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누군지 밝히지도 못하고, 그저 탈 쓰고 엉덩이 실룩거리고 V자를 그려대면서 춤을 추었다. 탈 안에서 얼마나 울었을까.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사람을 국회에 보내야 한다는 소박한 일념으로 몸을 흔들어대면서 ‘영석아 영석아,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할 것을. 네 혼은 지금 내 옆에 있느냐 길거리에 서 있느냐’라며 내내 울먹이지 않았을까.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몸으로 쓰는 ‘제문’을 담은 동영상을 보면서 아빠도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 오랜만에 하느님께 기도도 올렸단다. “제발 저분들이 한 번은 웃게 해주십시오. 다시 눈물 흘리더라도 잠깐만이라도 활짝 웃을 기회를 주십시오.” 그 기도는 이뤄졌지만 오늘밤 또 하나의 기도를 덧붙여보는구나. “다시는 슬픈 아버지들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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