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후예〉만큼이나 집중한 강좌.” 한 수강자가 남긴 표현이다. 4주간 진행된 뇌과학 특강에 대한 반응은 그만큼 뜨거웠다. ‘0세 영어’ ‘0세 수학’이 등장한 시대, “세 살이면 아이의 뇌가 완성된다”라는 둥 시장의 세뇌 공세를 정면으로 맞받아친 강의 내용이 부모들의 공감을 산 것이다. 3월29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진행된 마지막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5초간 이 문장을 빠르게 읽어보시라. 단어 안에 철자가 뒤바뀌어 있어도 자연스럽게 읽힐 것이다.

마지막 강좌도 퀴즈로 시작해보겠다. 제시문 하나를 보여드릴 테니 5초 안에 가볍게 읽어보시라(위 이미지 글 참조). 다 읽어보셨나?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하셨나? 그렇다. 자세히 보면 단어 안에 철자가 여기저기 뒤바뀌어 있다. 그런데도 이 문장은 자연스럽게 읽힌다. 왜 그럴까?(청중석에서 누군가 “뇌가 퉁쳐서요”라고 응답). 강좌 마지막 시간이 되니 다들 전문용어를 구사하신다. 퉁쳐서라고(웃음). 맞는 말씀이다. 뇌의 오른쪽 영역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면 왼쪽 영역이 그 정보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간 우리가 경험한 것들을 맥락화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그러다 보니 퉁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주제인 ‘이야기하는 뇌’의 핵심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술(human skill)을 배워야 한다고 지난 강의에서 말씀드렸는데, 휴먼 스킬의 핵심이 이야기다. 말 그대로 ‘이야기는 힘이 세다’. 요즘 ‘스토리텔링 시대’라는 말을 많이 쓴다. 농부들에게도 농산물을 팔지 말고 농작물과 관련된 스토리를 팔라는 식이다. 스토리텔링 수학 따위가 유행하면서 부모들도 ‘아이를 잘 키우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언변도 좋아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언변은 껍데기일 뿐이다. 인간의 이야기는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다.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한 일이 있다. 한 그룹은 가볍고 재미있는 수다, 다른 한 그룹은 심각한 토론을 30여 분간 나누게 한 뒤 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측정한 것이다. 두 그룹의 뇌를 촬영한 결과 가벼운 수다를 나눈 그룹의 전전두엽은 빨갛게 활성화되어 있는 반면 심각한 토론을 나눈 그룹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시험을 치른 결과도 수다를 나눈 그룹이 15%포인트 가까이 높게 나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것이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뇌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수다랑 비슷하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수다의 특징이다. 커피숍에 모여 수다 떠는 아줌마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분들의 특징은 한 얘기를 하고 또 한다는 것이다. 특별한 내용이 없다. 그러면서도 헤어질 때면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며 못내 아쉬워한다(웃음). 그런데 평소 껄끄럽게 여기던 이가 수다 자리에 끼어들었을 때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다들 말수가 줄어들면서 대화 주제도 의례적으로 변한다. 마음을 열지 않기에 수다도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곧 수다의 핵심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뇌가 좋아하는 것도 이것이다. 뇌는 정보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심이 많다.

잠깐 사진 한 장 보여드리겠다. 이렇게 현빈이나 송중기 사진을 보여드리면 여성들에게는 무의식적·생리적 변화가 나타난다. 저도 모르게 동공이 확대되고 안면근육이 이완되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다(웃음). 우리 몸에서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것 또한 이야기의 힘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드라마 속 판타지를 보며 어떤 이는 중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만났던 잘생긴 오빠를 떠올리고, 어떤 이는 결혼 전에 만났던 헤어진 옛 애인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그이랑 결혼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따위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편다. 이것이 인간의 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인공지능 같았으면 사랑의 유형을 분석하고 있을 시점에 인간의 뇌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쩌다 이렇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존재가 되었을까. 이는 ‘우리가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와도 연관되는 주제다. 400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유인원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직립보행을 시작했다는 인류의 조상 ‘루시(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에 인류학자들이 붙인 이름)’도 뇌 용량은 현생인류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런데 20만 년 전부터 인류의 뇌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점 복잡해지고 똑똑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용량보다 밀도와 복잡성이다. 뇌 용량으로야 인간이 코끼리를 따를 수 없다. 그런데도 코끼리는 인간만큼 똑똑하지 않다. 오직 인류의 뇌에서만 지금 같은 비약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두고 과학자들은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되어 그렇다는 등 다양한 가설을 제기해왔다. 반면 뇌과학자들이 최고로 치는 가설은 인간이 모여 살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응시’하지 않고 ‘감시’하는 부모들

돌이켜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연 앞에서 무력하다. 사자처럼 힘이 센 것도 아니고, 사슴처럼 잘 달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처음에는 서로 힘을 합치고 돕기 위해 모여 살게 되었을 것이다. 함께 살다 보니 서로 의사소통을 할 필요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구두 언어가 생긴 것은 그로부터 수십만 년이 지나서다. 그때까지 인류는 무엇으로 소통했을까? 손짓 발짓? 아마도 그 이전에 눈빛과 표정이 있었을 것이다. 눈빛이나 표정은 가장 오래된 인류의 언어요, 뇌에 가장 익숙한 언어이기도 하다.

유명한 커뮤니케이션 연구 논문들을 봐도 인간의 의사소통을 좌우하는 것은 표정과 몸짓 등 비언어적 정보(55%)와 목소리 등 말하는 태도(38%)다.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7%밖에 안 된다. 곧 인간들은 말보다 눈 맞춤, 자세, 제스처,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 등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응시가 뇌를 조각한다”라는 표현이다. 나는 응시를 ‘지긋이 바라보기’라 표현하고 싶다. 한 발 물러서서 지긋이 바라볼 때 아이들의 뇌는 건강하게 자란다. 이는 자존감으로도 연결된다. 자존감이 강하다는 건 든든한 뒷배가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엄마 아빠가 항상 뒤에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계셔’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자존감의 원천인 것이다.

ⓒ연합뉴스어린아이들은 언어가 아니라도 눈을 마주치는 등 다른 방식을 통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응시가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대신 부모들이 잘하는 게 감시·주시 내지 무시다. “엄마가 널 주시하고 있어” “엄만 다 알아” 하는 식이다. 이렇게 무시하고 감시를 당하면 뇌는 고장이 나버린다.

인간의 언어와 관련해 1980년대까지 주목받은 것이 결정적 시기 가설이었다. ‘늑대 소녀’처럼 특정한 생물학적 발달 시기를 놓쳐버리면 언어를 습득하기 어려워진다는 가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과학자들은 어린아이들이 언어가 아니라도 다른 방식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직후부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눈을 마주치는 등 엄마를 따라 하는 표정과 몸짓을 통해 인간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한 대표적인 예가 트로니크 박사의 ‘굳은 표정’ 실험이다. 실험 동영상을 보면 갓 백일을 넘겼음직한 아기와 엄마가 서로 마주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다. 아기가 뭐라 옹알이를 하면 부드럽게 대꾸를 해주는 등 엄마의 반응이 훌륭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엄마가 굳은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아기는 엄마의 변화를 곧바로 눈치 챈다. 그래서 엄마를 웃겨보려고도 하고 손을 뻗어 엄마 얼굴을 만져보려 하는 등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엄마와 이야기를 하려 시도한다. 외마디 비명도 질러본다. 그래도 엄마가 아무 반응이 없자 아이는 급기야 울음보를 터뜨린다. 거의 ‘멘붕’ 상태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어떻게 될까. 뇌가 고장 나기 시작한다. 2000년대 미국 소아과학회지에 실린 사진을 보면 학대당하고 무시당하며 자란 세 살짜리 아이의 뇌는 또래 아이의 뇌보다 상대적으로 작다. 용량보다 중요한 것은 밀도다. 정상적인 뇌는 속이 꽉 찬 수박처럼 내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데 비해 학대당한 아동의 뇌는 바람 든 무처럼 듬성듬성 빈 공간이 눈에 띈다. 일명 ‘쪼그라든 뇌’를 보여주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기는 했지만, 스트레스가 아이의 뇌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을 주고받는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뇌는 병에 걸리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바라보는 존재다. 바라보는 것이 곧 내가 된다. 그런 만큼 인간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 바라보기의 반대, 곧 외면(neglect)하는 일이다. 거절하고 무시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점점 ‘생까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시험을 위해 친구를 생까라’는 광고가 버젓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어찌 보면 4·16(세월호 참사)도 외면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일이다. 기억하기에 앞서 영원히 바라봐줘야 하는 일이다.

뇌과학자들이 말하는 마음이론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이야기하는 존재가 된 것은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 아닌 다른 존재의 마음에 관심이 많은 게 뇌의 특징인데, 이야기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오솔길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고속도로로 갈 때는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지만 오솔길로 갈 때는 그렇지 않다. 가다가 예쁜 들꽃이 눈에 띄면 거기 정신이 팔려 중간에 다른 길로 샐 수도 있다. 들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꽃이 내게 얘기를 걸어오는 것 같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마음속에 뭔가가 떠오른 것이다. 이를 뇌과학자들은 마음이론(Theory of mind)으로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마음, 침팬지에게는 침팬지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 마음이론이다.

마음이론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기가 자기임을 알아보는 것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만 24개월쯤 되면 거울에 비친 것이 자기 모습임을 안다. 자아가 형성된 것이다. 나아가 만 6세쯤이 되면 인간은 타자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그러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두 번째 단계, 곧 타자에게 마음을 부여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심지어는 무생물에도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게 인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한 지갑을 잃어버렸을 경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지갑 하나에도 마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잘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이 된 것이다.

알파고 쇼크 이후 이런저런 토론회 자리에 많이 불려 다니는데, 그때마다 안타까운 것이 미래 인재 육성이라는 관점에서만 논의를 전개하려는 점이었다. 물론 교육이 인재를 육성하는 수단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교육의 극히 일부분일 뿐, 핵심은 결국 인간을 키우는 것이다. 단순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나 아닌 다른 존재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이것이 곧 미래의 경쟁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현재의 경쟁 위주 교육은 10년 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질지 모른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뇌는 영양제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내 밖에 있는 존재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벽돌이 한 장 한 장 쌓이듯 인간이라는 존재도 만들어진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나?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대학 감옥 실험에 대해서는 많이들 들어보셨을 거다. 평범한 사람들을 모의감옥에 가둬놓고 간수 집단과 죄수 집단으로 나눠 역할놀이를 시켰더니 불과 며칠 만에 끔찍한 폭력 사태가 생겨 중단되었다는 실험이 그것이다. 실험을 마친 뒤 짐바르도는 이렇게 말했다. “폭력적인 인간이란 없다. 폭력적인 상황이 있을 뿐이다”라고. 요즘 학교폭력 연령이 자꾸 낮아진다는데 아이들이 이렇게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은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구조가 폭력적이라는 뜻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아이들이 인간으로 잘 자랐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른들이 먼저 솔성(率性)해서 인간의 길을 잘 걸어가야 할 것이다. 우린 인간의 길을 잘 보호해줄 의무가 있다. 앞선 세대로서, 아이들이 인간으로 잘 자랄 수 있게끔 지켜봐주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일 것이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신성욱 (과학 저널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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