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컨트롤타워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안전처를 만들어….” 세월호 참사 34일째이던 2014년 5월1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 구상에 따라 2014년 11월19일 출범한 조직이 국민안전처다. 국무총리실 직속 장관급 조직으로 기존 해양경찰청과 소방방재청, 안전행정부 등의 안전관리 기능을 흡수했다. 산하에 차관급인 중앙소방본부와 해양경비안전본부를 두었다. 정원 1만여 명, 예산 3조2114억원(2016년)의 거대 조직이다. 언론은 ‘재난 안전 컨트롤타워’의 출범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 이후엔 국민안전처라는 새로운 컨트롤타워를 중심으로 재난 대응 체계가 일사불란하게 정돈되었을 거라고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초동대처에 실패하면서 전국을 패닉 상태로 빠뜨렸던 지난해 여름 메르스 사태 당시를 상기해보자. ‘컨트롤타워처럼 보이는’ 조직이 너무 많았다.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이끄는 범정부메르스대책지원본부 이외에도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본부장인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 △청와대 긴급대책반 △문 장관이 팀장인 민관합동대응 태스크포스 △병원 폐쇄 명령권을 가진 전문가 중심의 즉각대응팀(공동팀장 복지부 차관·김우주 대한감염학회 이사장) 등이다.

ⓒ연합뉴스2015년 6월7일 최경환 당시 국무총리 직무대행이 정부세종청사에서 메르스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 역시 어떤 조직이, 재난 대응 체계의 중심에 자리한 컨트롤타워인지 몰랐던 것 같다. 국내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지 무려 20일째 되어서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자신 없는 어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경환 총리 대행이 컨트롤타워라고 보면 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의 무능한 대응에 비판이 쏟아지자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말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이 일로 경질된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은 지난해 2월 주중 대사에 임명됐다).

분명한 것은, 정부는 물론 국민안전처 역시 스스로를 컨트롤타워로 간주하지 않았다. 화려한 발족 과정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국민안전처는 재난을 통제(컨트롤)할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메르스 사태 당시를 다시 떠올려보자. 지난해 6월2일, 메르스 대처 체계에 대한 언론의 문의에 국민안전처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신종플루 같은 경우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300만명 정도 감염됐을 때 중대본(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을 가동했다. (메르스의 경우) 지금은 가동할 단계가 아니다.”

이 관계자는, 위기 수준이 가장 높은 ‘심각’ 단계에서 국민안전처가 중대본을 가동하도록 규정된 ‘감염병 위기관리 매뉴얼’을 그대로 읊은 것뿐이었다. 모든 시민이 놀랐지만, 그는 매뉴얼을 원칙대로 지키겠다고 말한 것에 불과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보면, 국민안전처에 관계 부처와 지자체에 대한 ‘컨트롤’ 기능이 갖춰져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지난해 6월6일은, 메르스에 대한 불안감이 최고조로 증폭된 시기였다. 확진 환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건 당국은, 평택성모병원 말고는 메르스의 주요 전염 통로가 되어버린 병원 명단을 이 시점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이날, 국민안전처가 한 일은 기껏, 긴급재난문자 발송이었다. 즉, 국민안전처는 중앙에서 상황을 장악하고 통제하는 ‘머리’가 아니라 후방에서 각종 행정 지원을 수행하는 팔다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즉각대응팀’에서 활동한 한 감염내과 전문의도 〈시사IN〉과의 통화에서 “누가 진짜 컨트롤타워인지 모르겠다. 의심 환자나 확진 환자가 생기면 중앙의 컨트롤타워가 딱 자리 잡고 전국 상황을 파악해서 이송할 병원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것도 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1년5개월째 회의도 참석 못하는 장관

물론 ‘감염병은 특수한 분야이기 때문에 국민안전처의 활동이 부각되지 못했다’라는 항변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침몰 사고에서는 어땠을까? 2015년 9월, 낚시 어선인 돌고래호가 전복되어 18명이 사망·실종되는 사고가 벌어졌다. 국민안전처 산하 해양경비안전본부의 ‘재난 대응’은 이 사고에서도 극히 부진했다. 신고 접수 2시간 후에야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국민안전처가 출범하면서 약속했던 ‘육상 30분, 바다 1시간 이내’라는 ‘골든타임’이 공염불에 불과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물론 ‘동·서해에 아직 해난구조대가 창설되지 않았’고 ‘헬기 역시 뜰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는 해명이 나오긴 했다(동·서해 해난구조대는 사고 뒤 창설됐다).

ⓒ연합뉴스2015년 9월7일 해경 관계자들이 제주 인근 청도에 포박된 돌고래호에서 증거물을 수집하고 있다.

수백억원을 들여 구비한 ‘표류 예측 시스템’의 정확도 역시 형편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양경비안전본부(해경)는 이 시스템을 참고해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정작 배는 시스템이 가리키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사고 발생 11시간여 만에 나타났다. 그것도 해경이 아니라 지나가던 어선이 발견해서 생존자 3명을 구조했다. 역시 수백억원 규모의 예산을 들인 V-PASS(어선위치 발신장치) 신호도 돌고래호의 침몰 이전에 끊겼다. 그러나 해경은 이를 이상 징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경은 돌고래호에 탑승했다고 믿어지는 사람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는 ‘잘 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해경은 이를 믿고 즉각적인 구조 활동에 나서지 않았다. 해경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돌고래호에 탑승하지도 않았는데 거짓 답변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국민안전처의 출범을 근본적인 변화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조직은 커졌지만 기존 안전행정부 역할을 국민안전처로 옮기고 소방방재청·해양경찰청 기능을 산하에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오히려 전문성과 독립성을 키워가야 할 두 현장 대응 조직을 국민안전처 산하 본부로 격하한 것은 거꾸로 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안전처에 컨트롤타워 기능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과거 재난 안전 분야에서 일했던 전직 고위 공무원은 “한 국가의 안전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려면 정치적인 힘이 필요하다. 대통령중심제 아래에선 청와대가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민안전처가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구조적 문제를 바꾸는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 중 하나는 과도한 규제 완화였다. 박근혜 정부의 ‘규제 개혁’ 기조하에 완화되는 것 중에는 안전 규제도 있다. 그런데 기획재정부·행정자치부·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이 참여하는 규제개혁위원회에 국민안전처 장관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다. 관련 시행령이 아직 개정되지 않아서다. 국민안전처 장관은 자신이 규제개혁위원회에 포함되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출범 1년5개월이 되어가도록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안전처 관계자는 “개정돼야 할 상위법 조항이 많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19대 국회도 끝나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시행령만 단독으로 개정하기로 국무조정실에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2주기 타임라인

● 2014년 4월16일: 참사 발생. 희생자 304명

● 2014년 5월19일: 박근혜 대통령 눈물의 대국민 담화. 해경 해체 발표
● 2014년 7월14일: ‘수사권과 기소권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요구하며 유가족 15명 단식 시작. 유민 아빠 김영오씨 8월28일까지 46일간 단식
● 2014년 7월22일: 경찰, 유병언 전 회장 사망 발표
● 2014년 11월7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조직을 규정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2015년 1월1일 시행)
● 2014년 11월11일: 선체 수색 중단. 미수습자 9명
● 2014년 11월19일: ‘재난 안전 컨트롤타워’로 국민안전처 출범
● 2015년 4월16일: 참사 1주기. 청와대로 행진하려던 유가족들 경찰에 가로막혀 광화문 앞에서 밤샘 농성
● 2015년 8월16일: 인양 작업 착수
● 2015년 9월14일: 특조위 진상 규명 신청 접수 시작
● 2015년 9월30일: 배·보상 신청 종료. 희생자 가족 68% 신청
● 2015년 12월14~16일: 특조위 1차 청문회. 구조 당시 대응의 적정성 조사
● 2016년 1월12일: 생존자 75명 포함해 전체 학생 86명 단원고 졸업
● 2016년 3월28~29일: 특조위 2차 청문회. 참사 원인 규명
● 2016년 7월: 인양 완료(예정)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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