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에 텐트가 세 동이다. 두 곳은 잠을 자는 ‘숙소동’, 나머지 한 곳은 식당으로 사용된다. ‘식사동’에서 망원렌즈로 바다 쪽을 겨눈다. 촬영 대상은 텐트에서 약 1.6㎞ 떨어진 세월호 인양 작업 현장이다. 육안으로는 인양 업체인 중국 상하이샐비지 작업선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형 망원렌즈를 통해야 작업자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4월5일 〈시사IN〉 취재진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동거차도에 있는 야산의 정상에 올랐다. 그곳에서 텐트들을 만났다. 단원고 2학년4반 성호군 아버지 최경덕씨, 하용군 아버지 빈운종씨, 승묵군 아버지 강병길씨 등이 텐트를 지키고 있다. 작업선에서 눈여겨볼 만한 일이 일어나면 망원렌즈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어 유가족들의 SNS 대화방에 올린다. 유가족들은 세월호가 인양되는 7월 말까지 이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우산 아래서, 하루 종일 망원렌즈를 바라보던 최경덕씨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며 거푸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날의 참사 이후 2년이 지났다. 최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의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지금도 참사 당시 동영상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한밤중이 아닌 아침이었고 파도는 0.5m로 비교적 잔잔했다. 날씨도 나쁘지 않았다. 구조 시간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304명(미수습자 9명 포함)이 사망했다. 아이들이 왜 숨졌을까? 국가는 왜 구조하지 못했을까?

ⓒ시사IN 이명익
세월호 침몰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섬인 동거차도 정상에 텐트를 친 유가족들이 세월호 인양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나 국회가 답을 찾아 나서긴 했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검찰, 경찰, 감사원, 국회,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 등이 세월호 참사를 조사했거나 지금도 조사 중이다.  

먼저, 수사권을 가진 검찰은 2014년 10월14일 청해진해운 직원, 실소유주인 유병언 일가, 해경 123정장 등 총 399명을 입건하고 그중 154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174일간 검경 합동수사본부를 꾸려 저인망 수사를 한 결과였다. 청해진해운의 무리한 수리 증축과 과적으로 세월호의 복원성이 약화된 상태에서 조타수가 서툴게 급격한 변침(항로 변경)을 시도한 것을 사고 원인으로 꼽았다. 선원의 과실에 따른 대형 사고라는 설명이다. 아이들이 왜 숨졌는지에 대해 국가기관이 내놓은 첫 번째 ‘모범답안’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고 당시 세월호의 조타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는지에 관해 합리적인 의심이 있다”라며 조타 과실을 사고 원인으로 단정하지 않았다. 선박 결함에 따른 사고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174일 수사 끝에 국가기관이 내놓은 모범답안이 무너진 것이다. 유가족들은 지금도 배가 왜 침몰했는지, 아이들이 왜 숨졌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듣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가 왜 구조하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도 여전하다. 검찰이 세월호 참사 구조와 관련해 책임을 물은 최고위직 공무원은 해경 차장(치안정감)이다. 검찰은 구조업체 언딘에 세월호 구조·수색 업무를 맡기기 위해 수중 수색 작업을 지연시킨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최상환 차장(치안정감)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런데 첫 신고부터 세월호 침몰까지 직접 구조 활동에 관여한 해경 가운데 형사처분을 받은 이들은 전부 하위직이다. 진도VTS 센터장 등 관제 담당자 13명, 초기 구조 현장 지휘관으로서 선내 승객 구호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혐의(업무상 과실치사 등)로 기소된 해경 123경비정 김경일 정장 등이다. 김 정장은 징역 3년형이 최종 확정됐고, 최 차장 등은 재판이 진행 중이다(〈u style=세월호 참사 2주기 타임라인 참조).
검찰은 윗선인 해경 지휘부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며 면죄부를 주었다. 해경-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청와대 등 구조 지휘 라인은 애초부터 수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국가는 왜 구조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검찰이 내놓은 ‘모범답안’을 요약하면 이렇다. ‘선원들은 당황해서 먼저 탈출했고 해경은 경황이 없어 선내로 진입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 1주기인 2015년 4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팽목항을 찾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뒤 방파제를 떠나고 있다.

하위직만 촘촘하게 훑고 지나간 조사

2014년 5~6월 이뤄진 감사원 특별감사도 유가족들의 의문에 답을 주지 못했다. 감사원은 감사원 제2사무차장 등 57명을 투입해, 안전행정부·해양경찰청·해양수산부·한국선급 등을 특별 감사했다. 이 역시 밑바닥의 하위직만 촘촘하게 긁고 끝났다. 과연 대통령이 제대로 보고를 받았느냐는 의구심을 잠재울, 청와대 보고 체계에 대한 감사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감사원 소속 5급 공무원 2명이, 사고 당일(4월16일) 상황 관리를 담당한 청와대 행정관(5급) 4명을 방문 조사한 게 전부였다. 감사원은 현장 조사 한 달 뒤 “청와대는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서면확인서만 받고 끝냈다.

검찰이나 감사원이 행정부에 속한 국가기관임을 감안하면, 대통령 직무와 관련한 조사는 태생적으로 한계를 띨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2014년 6월 국회의 세월호 국정조사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청문회 한번 열지 못하고 파행으로 끝났다. 정부·여당은 이 모든 요구를 ‘정치 공세’로 받아들였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밝히고 개선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막아야 할 정치 공세로 판단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만 봐도, 정부·여당이 사고 조사를 정치 공세로 받아들여 사실상 방해하는 경우는 나타나지 않는다.

2001년 9·11 테러가 터지자, 미국 의회는 여야 추천 5명씩 동수로 9·11 국가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이 위원회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집무실에서 증언을 들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선서를 하지 않고, 1시간으로 시간을 한정하는 등 조사에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증언은 3시간10분 동안 이뤄졌다. 부시 대통령의 증언은 공개되지 않았다.

ⓒ시사IN 조남진
2014년 5월9일 새벽 세월호 희생자 학부모들이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촉구하고 있다.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당시 일본 의회 역시 초당적으로 협력했다. 민간인 전문가를 국회 차원에서 추천해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구로카와 기요시(黒川清) 전 일본학술회의 회장을 위원장으로 선임한 국회조사위원회는 간 나오토 당시 총리와 도쿄전력 회장 등 38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직접 조사했다. 이런 조사가 있었기에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후 법과 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졌다.

그러나 대한민국 검찰과 감사원은 밑바닥 하위직만 훑다가 ‘윗선’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직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다. 현재 활동 중인 특조위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특조위 역시 정치적 공세용 기구로 바라볼 뿐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노골적으로 반대한 인사를 여당 몫 위원으로 추천한 데 이어, 특조위가 청와대 대응과 관련한 조사를 결의하자 고사 작전에 돌입했다(〈u style=“세월호 특조위는 반정부 기구가 아니다” 참조). 정부·여당이 짠 시간표대로라면 특조위는 오는 6월30일 활동을 종료한다. 세월호 인양은 7월 말에나 이뤄진다. 정부·여당의 태도 변화가 없다면 유가족들은 내년 3주기 때도 ‘아이들이 왜 죽었는가?’ ‘국가는 왜 구조를 하지 못했는가?’라는 기본적인 의문을 풀지 못할 것이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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