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세상 누구라도 장점만 가진 사람은 없어. 저마다 흠이 있고 결점을 지니지. 동시에 아무리 빛나는 과거를 지닌 이라 하더라도 차마 내보이기 싫은 부끄러운 기억을 여러 갈래 품고 있기 마련이야. 역사 또한 마찬가지야. 눈부신 영광의 역사가 있다면 ‘흑역사’라고 지칭되는 감추고 싶은 역사 역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거란다. 아빠가 네게 가끔 얘기해주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도 그렇지.

너도 익히 알 만한 쟁쟁한 인물들도 독립운동 와중에 이런 파 저런 모임, 아무개 단체, 특정 지역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고, 심한 경우엔 서로 죽고 죽이기도 했다. 독립군끼리 전투를 벌여 1000명 넘게 죽은 자유시 참변은 그 한 예일 뿐이야. 어떤 단체는 망해버린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답시고 봉건 왕조를 거부하는 독립군들을 습격해서 죽여버리기도 했다. 좌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빨갱이’와 ‘반동분자’라는 험악한 욕설을 주고받으며 총질하는 경우도 있었다. 네가 잘 아는 백범 김구도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를 암살한 바 있다. 자신도 좌익의 습격에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 어쩌겠니, 그것도 우리 역사이고 사람들의 삶이었던 것을. 또 이런 내부 분열과 파벌 싸움이 우리 민족에게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며칠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이라는 그럴듯한 직에 있는 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어. “임시정부는 민족운동단체이지, 정부가 아닙니다. …임시정부가 설립될 때는 일제강점기여서 선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13개 지역별로 대표자를 뽑아 대표자회의를 만들고, 이들을 통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긴 했지만 국민을 대상으로 직접선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독립기념관독립운동가 중 한 명인 이시영(첫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의 형제들은 엄청난 불행을 겪어야 했다.

유감스럽지만 “선거를 안 했으니 정부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지극히 ‘무식하다’는 말을 들어 마땅하다. 이에 따르면 세계사상 등장하는 모든 ‘망명정부’는 다 허깨비가 돼버리거든. 저 콧대 높은 프랑스 드골의 망명정부나 폴란드의 망명정부도 정부를 참칭하는 운동단체에 불과하다는 얘기잖아.

다만 저 관장님이 드러내고 싶은 건 바로 임시정부의 흑역사, 즉 어두운 면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일 것 같구나. 정부랍시고 처음엔 그럴싸하게 출발했지만, 추대된 대통령(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나버렸지. 그가 미국에 위임 통치를 요청한 걸 두고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마저 팔아먹었다(신채호)”라는 극언이 나오고, 이를 둘러싼 싸움박질은 탄핵 소동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러다가 그나마 처음 있던 사람들 대부분 떠나버리고,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허름한 구석방 하나 빌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네 뭐네 하면서 군대도 조직도 제대로 없이 폭탄이나 몇 개 만들어 던지던 사람들의 모임이 무슨 정부냐, 하는 감정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아빠가 반문하고 싶은 게 있어. 그렇게 힘겹고 가난하고 위험한 세월을 끝끝내 견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하는 거야. 영화 〈암살〉에서 해방 소식이 들려왔을 때 임시정부 사람들은 환호하지.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아빠는 그 소리에 울컥했어. 저분들에게 집이란 무슨 의미였을까.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결의한 29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사람인 성재 이시영의 가문은 대대로 명문가에 오늘날 서울 명동 일대의 땅 태반을 소유한 엄청난 부자였어. 하지만 이씨 가문 6형제는 모든 가산을 팔아치우고 온 가족과 그들을 따른 노비들(이미 해방된 사람들이었지만 죽어도 주인 뒤를 따르겠다고 해서)까지 수십명을 동반해서 일제히 만주로 향했다. 조선에 남았더라면 배터지게 먹고 마시며 한세상 즐겼을 그의 형제들에게는 잇단 비극이

ⓒ연합뉴스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용직 관장은 “임시정부는 민족운동단체이지 정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닥쳤어. 한때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던 이씨 가문 며느리들은 삯바느질로 연명해야 했고 아이들도 학교에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일찍이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엄청난 부를 누렸던 둘째 이석영은 상하이의 빈민가에서 굶어죽었어. 이석영의 아들은 의열단원이 되어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다가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이시영의 동생 철영도 사망했고, 맏형 건영의 가문은 대가 끊겼으며, 막내 호영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소식이 끊겨버렸단다.

망명했던 여섯 형제 가운데 살아남아 해방을 본 것은 다섯째 시영이 유일했어. 1919년 성재 이시영은 갓 태어난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을 맡았다. 1945년 해방 당시에도 임시정부의 재무부장이었다. 그에게 그 26년 세월은 무엇이었을까.

일화 하나를 더 들어볼게.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최중호 선생의 딸 최윤신씨의 회고야. 하루는 학교 졸업식에 헌옷을 빨아 입고 가라는 어머니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고 해. 엉엉 울고 있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떡 들어오더라는 거야. 사연을 들은 백범은 다음 날 또 불쑥 나타나서 돈 1원을 내놓으면서 그러셨대. “제수씨, 윤신이 옷 한 벌 해주세요.” 그때 최윤신씨의 어머니의 답은 이것이었다는군. “선생님, 또 어디 가서 뭘 저당잡히셨어요?”

돈 나올 구멍이 없는 걸 뻔히 아는데 난데없는 돈 1원이 나온 건 겨울옷이든 뭐든 저당을 잡혔다는 거였지. 최윤신씨의 회고를 그대로 옮겨볼게. “선생님께선 웃으시면서 ‘글쎄, 그건 묻지 말고… 그 어린 것이 자기 딴엔 졸업식인데…. 어서 옷 해 입혀 졸업식에 보내세요’ 하시더라고요. 어린 맘에 그게 어찌나 기뻤던지, 제가 지금 여든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 일이 제 가슴속에서 쟁쟁합니다.”(〈대한민국 임시정부 바로알기〉, 정인출판사)

비록 미약했을망정, 의견이 달라 치고받고 싸우면서 떠날 사람 떠나고 남을 사람 남아 애면글면 간판 유지하기에도 힘겨웠을망정, ‘대한민국’의 이름을 처음 사용했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위해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부서졌던 사람들의 역사를 “선거도 치르지 못한, 정부도 아닌 운동단체”로 폄하하는 오늘날의 ‘역사박물관장’이라니. 아빠는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 중국인들을 볼 낯이 없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온 나라에서 금모으기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어. 장롱 속에 재워둔 금붙이들을 헌납 또는 싼값에 팔아서 나라의 빚을 갚자는 운동이었지. 금모으기 운동이 한창 벌어지던 무렵 베이징의 중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는 뜻밖의 전화가 걸려와. 중국의 전시 수도에서 당시 임시정부 청사를 관리하던 중국인 16명이었어. 그들은 작은 정성이나마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며 1000달러를 보내겠다고 했다. 1000달러면 당시 중국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액수였어. 결코 ‘작은’ 정성이 아니었다.

워낙 내륙에 위치해서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들르지도 못하는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관리인 16명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거금을 모았을까? 수십 년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누추한 거점이나마 지탱하며 살았던 과거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에게 감화되었다는 이유 외에 다른 것이 있을까? 자신들이 관리하던 청사를 사수했던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도 가만있을 수 없지 않아 이거?” 하며 선뜻 지갑을 열었다는 외에 다른 해석이 있을까?

이 중국인들에게 우리 ‘역사박물관장’은 도대체 뭐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빠 역시 그 중국인들을 볼 낯이 없다. 우리라도 기억하자.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고.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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