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문 보고 너무 궁금해서 뒤늦게 수강 신청을 하게 됐어요.” 뇌과학 특강이 진행되는 동안 이를 주최한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게시판에 오른 글이다. 실제로 게시판에는 “단순히 두뇌 계발법을 알려주는 강의인 줄 알았는데 들을수록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사색과 질문을 하게 되었다” 같은 후기가 줄을 이었다. ‘알파고 쇼크’ 이후여서 더 큰 화제를 부른 신성욱씨의 세 번째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놀이는 인간의 본능이다. 아니, 인간만이 아니다. 포유류 이상 고등지능을 지닌 동물은 본능적으로 잘 놀게끔 타고났다. 돌고래는 돌고래의 방식으로, 사람은 사람의 방식대로 놀 뿐이다.

요즘 아이들이 학교·학원을 오가느라 제대로 놀지도 못한다고 불쌍히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내 생각엔 요즘 아이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잘 놀고 있다. 혹시 여중생이나 여고생들이 신고 다니는 캐릭터 양말을 보셨는지. 만화 주인공부터 시작해 화투짝의 ‘비광’ ‘똥광’ 무늬까지 온갖 캐릭터가 다 있다. 학교에서 두발·복장 따위를 규제하다 보니 손바닥만 한 양말에라도 자기 개성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다. ‘낮잠베개’라는 소품도 등장했다. 이걸 늘 끼고 다니다가 틈만 나면 아무 데서나 베개를 벤 채 잠이 든다.

참으로 놀라운 창의력 아닌가? 거리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을 보면 대부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걸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어른이 많다. 그러나 아이들은 실상 이 순간에도 놀고 있다. 학교 마치고 학원으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에도 스마트폰으로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인터넷을 탐색하면서 노는 것이다.

ⓒ연합뉴스흙놀이를 좋아하는 것은 전 세계 아이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흙 속의 박테리아를 상대하며 자연스럽게 항체도 형성된다.

인간은 왜 이런 식으로 열심히 노는 것일까?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놀이에 관심을 둔 것은 1960년대부터다. 아무것도 없이 지루한 환경에 놓인 쥐와 장난감 등이 많이 주어진 환경에 놓인 쥐를 비교했더니, 장난감을 갖고 논 쥐들의 대뇌피질이 훨씬 발달했더라는 연구 등이 이때 등장했다. 그 뒤 어릴 적 잘 놀았던 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자기절제력도 뛰어나다는 식의 연구가 잇달았다. 나아가 행동주의 심리학자로 유명한 스키너는 보상과 처벌을 통해 인간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긍정적인 행동을 하면 상을 주고, 부정적인 행동을 하면 벌을 주는 식으로 아이들의 삶이나 학습능력을 디자인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현행 교육 시스템의 밑바탕에는 이런 행동주의 심리학 내지 행동주의 교육학이 깔려 있다. 보수건 진보건 마찬가지다. 이런 유의 관점에서 보자면 놀이는 뇌 발달의 한 방편일 뿐이다. 여러분도 오늘 주제인 ‘놀이와 뇌 발달’을 접하고 ‘어떻게 노는 게 아이의 뇌 발달에 도움이 될까’를 먼저 떠올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우리가 이처럼 놀이를 방편으로 여기는 관점을 뛰어넘었으면 한다. 2강 주제였던 읽기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의식적으로 독서 대신 읽기라는 표현을 쓴다. 독서라고 말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이를 가르쳐야 할 방편인 양 여기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독서교육’이라는 용어가 대표적이다.

읽기나 놀이는 방편으로만 대할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이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생물학적 시간표 속에서 읽기나 놀이가 갖는 의미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 150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엑스포를 기념해 에펠탑을 세우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태어나서는 안 될 흉물 취급을 받은 셈이다. 엑스포 이후 철거 약속을 전제로 완공된 에펠탑은,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파리의 명물로 거듭났다. 파리를 방문한 여행자들은 에펠탑 앞에서 인증샷을 찍곤 한다. 프랑스를 점령한 히틀러 또한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15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에펠탑 자체가 사람들에게 고유한 의미를 갖는 어떤 공간으로 자리한 것이다.


인류의 지속 가능성이 놀이에 들어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시간표 또한 이와 같다. 인간은 저마다 유전자 지도를 갖고 태어나며, 그 지도에 따라 그때그때 필요한 재료를 써서 정해진 공기(工期)에 맞춰 집을 지어 올리게 된다. 그 과정을 에펠탑에 비유하자면, 12세 이하인 아이들은 지금 탑의 맨 하단부를 쌓아올렸을 뿐이다. 이것이 어떤 모양으로 완공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탑을 쌓아올리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 내 밖에 있는 것들과 관계를 맺는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밖에 있는 것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놀이가 중요하다.

이 강좌에서 여러 번 강조한 대로 인간이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술(human skill)을 배워야 하는데, 그중 중요한 것이 걷기다. 단순히 잘 걸어야 건강해지고 심폐기능이 좋아져서가 아니다. 인간이 두 발로 잘 걷는다는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중력에 잘 적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걷기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걷기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놀이다. 놀이를 할 때 아이들은 가장 많이 걷고 뛰고 다양한 자세를 취한다.

 

ⓒ연합뉴스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보면서 ‘논다’. 이 놀이에는 몸을 쓰는 행위가 빠져 있다.

그뿐 아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나 아닌 다른 존재와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 흙놀이를 좋아하는 것은 전 세계 아이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흙 속에는 수많은 박테리아가 있다.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면서 이렇게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상대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항체도 형성된다. 그 덕분에 훗날 같은 상대를 만나도 살아날 가능성이 높게끔 면역력을 얻는 것이다. 물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중금속으로 오염된 흙이 걱정될 것이다. 그럼에도 원리가 이렇다는 건 알아두셨으면 한다.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동물을 만지고 싶어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처럼 아이들의 놀이에는 인류의 지속 가능성이 들어 있다. 얘기가 거창한가? 그럼에도 사실이 그렇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가고 땅을 파고 물속을 헤엄치면서 온갖 해괴한 짓을 하고 놀았다. 이것 자체가 내 밖의 무한한 원인들과 끊임없이 만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창의성은 이 과정에서 얻게 되는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놀이의 핵심은 창의성 발달이 아니라 무한한 원인들과 만나는 것이다.

놀이를 통해 끊임없이 외부와 만나 실험하고 도전하는 과정에서 창의성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방학 때 창의성 캠프 따위를 다녀봐야 소용없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방식을 답습할 뿐이다. 오늘날 아이들의 공부 방식, 삶의 방식이 실은 이렇다. 어른들의 삶이 아이들의 삶을 점령한 것이다. 어쩌면 19세기 말~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들이 힘없는 국가를 굴복시키고 자기네 문화를 강제 이식했던 것 같은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노는 시간보다 가만히 앉아 뭔가를 하는 시간이 월등히 많은 괴상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주시 내지 감시하는 부모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캐릭터 양말이나 스마트폰을 갖고서라도 놀고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이런 놀이에는 결정적 요소가 빠져 있다. 몸을 쓰는 행위가 그것이다. 놀이 중에서도 프리 플레이(free play)가 중요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번역하자면 ‘자유놀이’쯤 될 터인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용어를 쓰고 싶지 않다. 자유놀이 학원이 생길까 두려워서다(웃음). 알파고 쇼크 이후 당장 알파고 바둑학원이 생겼다 하지 않나.

어쨌거나 학자들이 규정하는 프리 플레이의 네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스스로 하고 싶고(Self-motivated),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어야 하고(Imaginative), 누구의 간섭도 받지 말아야 하며(Independent), 짜여 있어서는 안 된다(Unstructured)는 것이다. 어렵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이렇게 논다. 그런데 어쩌다 놀이를 학문적으로 재규정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이 놀이를 새삼 강조하고 나선 것은 이상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서다. 이를테면 고립된 아이들(Isolated Kids)의 등장이다. 대표적인 예가 2007년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난사 참사를 일으킨 한국계 미국인 조승희다. 거슬러 올라가면 1966년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베트남 참전 경험이 있던 공과대 학생(찰스 휘트먼)이 학교 시계탑에 올라가 15명을 조준 사살한 사건도 있었다.

이런 끔찍한 범죄가 벌어지면 전문가들은 가해자가 결손가정에서 자랐는지, 아동학대를 당했는지 등등을 조사하는 게 그간의 통례였다. 그런데 휘트먼이나 조승희는 중산층 가정에서 착실하게 자란 모범생이었다. 공통점은 성장 과정에서 외톨이로 자라며 충분한 놀이 활동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 이로 인해 휴먼 스킬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떨어졌다는 것 등이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사례이니 너무 겁먹지는 마시라.

결론은 아이들을 마음껏 놀게 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예행연습한다. 예를 들어 여럿이 딱지놀이를 하다 한 아이가 딱지를 왕창 따가면 나머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동맹을 맺어 그 아이를 배격한다. “너랑 안 놀아.” 이 한마디로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것이다(웃음). 그럼 딱지를 딴 아이는 손해를 무릅쓰고 자기가 합법적으로 딴 전리품을 다시 나눠주면서 타협을 시도하는데, 타협선은 40% 안팎이다. 곧 딱지를 10장 땄으면 이 중 4장을 돌려주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문명권에서나 비슷하게 관찰된다. 무리에서 쫓겨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익혀나간다. 아이들은 총싸움·칼싸움이나 인형 놀이를 통해 인류가 수만 년 전부터 벌여온 수렵·채취나 육아 활동을 모방하면서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를 밈(Meme)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문화적 정보를 유전자(gene)처럼 후대에 물려준다는 것이다.

밈의 핵심은 모방이다. 아이들은 가르쳐서가 아니라 따라 하는 것을 통해 휴먼 스킬을 익혀나간다. ‘언어는 갖고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가르치는 것인가.’ 이는 언어학자 사이에 오래된 논쟁거리이기도 했다. 언어는 갖고 태어나는 것이라는 놈 촘스키의 견해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님 촘스키’라는 침팬지를 인간의 아이들과 함께 기르면서 언어(수화)를 가르치려 시도한 일도 있었다. 결과는? 침팬지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기는커녕 인간의 아이들이 침팬지 말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인간의 아이들은 본래부터 모방의 천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의 방식을 가르치지 말고 보여줘라

아빠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잠든 아기를 보고 흔히 ‘피는 못 속인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는 유전자 때문이라기보다 아기가 본능적으로 아빠를 따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는 부모의 거울일 수밖에 없다. 내 표정 하나, 몸짓 하나, 말투 하나가 아이에겐 모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요즘 식당에 가면 섬뜩할 때가 있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엄마가 떠먹여주는 대로 입만 벌리는 있는 아이, 그 앞에서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해 있는 아빠들을 종종 보게 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향해 기계처럼 달려드는 건 동물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옆에 어미가 있건 새끼가 있건 경쟁적으로 제 뱃속부터 채우려 든다. 반면 인간의 먹는 방식은 훨씬 복잡하다. 뭘 먹을지 생각한 다음 요리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음식을,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려서 함께 먹는 것이 우리 인간의 방식이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먹는 목적은 같다. 음식을 섭취해야 살 수 있으니까 먹는 것이다. 그러나 먹는 방식은 이처럼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둘씩 휴먼 스킬을 터득했기에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이 뇌가 발달하고 아이가 잘 자라길 바란다면 인간의 방식을 보여주시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것, 이것이 교육의 핵심이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신성욱 (과학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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