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경기에서 4등은 애매한 등수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은·동의 메달을 목에 걸 수는 없지만 꼴찌 부근을 헤매는 성적도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아깝다. 최근 〈4등〉이라는 영화의 시사회를 다녀왔는데 주인공인 수영 선수 준호의 성적이 늘 그랬다. 준호는 수영이 즐겁고 ‘4등’도 뿌듯한 초등학생이다. 혹독한 훈련을 피해 잠수와 유영을 즐기는 준호의 모습은 물고기처럼 평화로워 보인다.

그런 준호에게 엄마는 닦달과 언어폭력을 불사한다. “야, 4등! 넌 그러고도 웃음이 나오냐? 너 때문에 진짜 미치겠다!” 코치는 대걸레 매타작으로 준호를 훈련시킨다. 그 또한 무자비한 폭력에 반발해 선수 생활을 포기한 희생양이지만 배운 대로 가르칠 뿐이다.

급기야 준호는 온몸이 시퍼렇게 멍든 채 은메달을 목에 건다. 폭력을 알아채고 흥분하는 준호 아빠에게 쏘아붙이는 엄마의 항변이 기가 막힌다. “난 솔직히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이 더 무서워!” 이 한마디는 한국 스포츠계에서 왜 폭력이 끊이지 않는지, 부모들은 왜 때려서라도 메달을 따게 해달라며 폭력을 용인하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정작 준호 엄마는 왜 그렇게까지 메달에 집착할까? 한국에서 운동을 전공이나 직업으로 삼겠다고 작정하면 메달은 목숨 걸고 따야만 하는 지상 과제다. 지난 수십 년간 학교 체육은 올림픽이나 각종 체전의 메달리스트를 길러내는 1차 양성소였다. 한국 스포츠의 목적이 ‘국위 선양’으로 정해지다 보니 국제 무대에서 나라 이름을 빛낼 엘리트 선수를 길러내는 것이 최대의 목표다. 대학 진학이나 직업 선수로 활동하기 위해서도 금메달과 상위 성적은 필수인데, 이게 또한 선수에게만 이로운 게 아니다. 코치의 고용을 보장하고 학교 평가가 달라지며 교육청의 예산과 공무원 승진과도 줄줄이 연결되어 있다. 이쯤 되면 운동선수의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는 폭력적인 구조가 굳건히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그 근원에 애국주의와 승리지상주의, 그리고 엘리트주의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영화 〈4등〉〈/font〉〈/div〉

새삼 스포츠의 목적과 그 정신을 돌아보자. 올림픽헌장 기본원칙 제2조는 올림픽의 목적이 “스포츠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고 인간이 조화롭게 발전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스포츠는 국위 선양을 위한 메달 따기 경쟁이 아니며 운동선수는 메달 따는 기계가 아니다. 스포츠는 나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활동이며 그를 통해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신체 활동이다. 신체적 폭력이나 학습권 침해와 같은 인권침해는 용납될 수 없을뿐더러 스포츠 그 자체가 누구나 향유할 권리다. 이 때문에 올림픽헌장 기본원칙 제4조는 “스포츠는 인권”이라고 천명한다.

2007년 세계여성포럼에서 세계적인 회계법인 언스트앤영의 베스 브룩 부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농구 선수 출신인 그는 “스포츠를 통해 협동과 배려, 판단력과 순발력을 배웠고 결정적으로 리더십을 키웠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렇게 말할 우리 선수 출신들은 얼마나 있을까.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인권에 기반을 둔 접근’이어야

지난 3월21일 엘리트 스포츠를 담당해온 대한체육회와 생활 스포츠를 관장해온 국민생활체육회가 하나로 합쳐진 ‘통합 대한체육회’가 출범했다. 두 단체의 통합은 엘리트 체육에서 생활체육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한국 스포츠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외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년간 체육단체들은 폭력과 성폭력, 학습권 침해 등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노력해왔지만 현장에서 문제는 연일 터져 나왔다. 체육계의 대응책 또한 솜방망이 내지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도 여전하다.

통합 대한체육회가 해결해야 할 난제가 산적해 있지만 그 모든 문제의 해결은 결국 ‘인권에 기반을 둔 접근(human rights-based approach)’이어야 한다. 스포츠는 인권이기 때문이다. 인권 측면에서 보면 본격적으로 제기되지 않은 문제도 많다. 스포츠계의 성차별과 여성 선수의 건강 문제, 산전 산후 및 육아기의 훈련에 대한 지원 등의 문제는 외면할 수 없는 현안이다. 또한 장애인·외국인·노인 등이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스포츠를 통해 각양각색의 빛나는 다양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통합 체육회가 힘을 쏟는다면 체육회 또한 덩달아 빛날 것이다.

올여름은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열기와 함께 보낼 것이다. 메달리스트에게 보내는 열광적인 박수가 혹여 선수들을 메달 기계로 내몰거나 국가주의에 기반한 스포츠 정책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4등은 물론 꼴찌에게도 박수를 보내자.

기자명 문경란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전 서울시 인권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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