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은 일반적으로 여행의 핵심 취급을 못 받는 게 사실이다. 생각해보자. 멋진 경치, 완벽한 날씨, 압도적인 역사 유적, 아름다운 마을, 와일드한 야외 활동, 창문 밖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는 아늑하고 돈값 제대로 하는 숙소, 백사장 위에서 즐기는 황홀한 사교 활동은 여행을 가야만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쇼핑은 집에서 하는 편이 사실 더 낫다.

그럼에도 쇼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여행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먼저 다양한 여행 방식 중에는 딱 쇼핑을 목적으로 홍콩·뉴욕·런던·도쿄·서울 등의 쇼핑 명소를 방문하는 여행도 있고, 더 일반적으로는 쇼핑을 여행의 여러 목표 중 한 가지로 삼는 경우도 있다. 특히 한국보다 더 부유한 나라에 가게 될 경우에는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을 한 가지씩은 사오고 싶기 마련이다. 이런 나라에 갈 때면 내가 꼭 뭔가 살 계획이 없다 하더라도 남이 “이번에 그거 꼭 좀 사다 줘요”라고 부탁해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종류의 쇼핑은 목표한 물건을 사는 데 성공할 경우 여행 자체를 만족하게 만들고 구매에 실패할 경우에는 불만족을 낳는다.

이와 달리 좀 더 일반적인 여행 쇼핑이라 할 수 있는 경우는 여행 중에 우연히 또는 “쇼핑이나 해볼까?” 하며 시장을 걷다가 좋은 물건을 발견해 구매하게 되는 경우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아서 구매한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우리의 여행 만족에 기여한다. 무엇보다도 여행 중 구매하는 물건은 단순한 상품의 의미가 아니라 여행할 때의 감정과 기억이 찰싹 달라붙은 기념품으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연합뉴스인도의 재래시장 파하르간지는 배낭여행자들의 집합소다. 기념품 등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빼곡하다.

사람의 마음이 물건에 달라붙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서 나왔다. 프로이트는 이를 ‘부착’이라 불렀는데, 프로이트 식 예화를 한 가지 들어보겠다. 만약 어떤 아이가 집에 놓여 있던 화병을 떨어뜨려 깼을 경우 우리는 보통 아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좀 조심조심해서 다녀!”라고 혼을 내고 말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아이의 이런 행동에 심층적 의미가 있다고 보고 아이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 화병에 네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부착시켰던 거니?”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은 무의식 속에 들끓는 욕망을 삶의 에너지로 삼는데, 이 욕망은 무의식 속에 담겨 있기만 한 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특히 욕망의 대상(프로이트는 여자아이의 욕망 대상은 주로 아버지이고, 남자아이의 욕망 대상은 주로 어머니라고 말한다)이 지니고 다니거나 애지중지하는 물건 또는 욕망의 대상과 유사한 속성을 가진 물건에는 욕망이 잘 달라붙는다.

화병을 깨뜨린 아이는 어머니가 화병의 꽃을 열심히 가꿨기 때문에, 혹은 화병의 곡선미가 어머니의 몸과 유사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애정 또는 미움 따위) 욕망을 화병에 부착시킨 상태일 수 있다. 이렇게 어떤 물건에 욕망을 부착시켰을 경우에는 원래 욕망의 대상에게 갖는 감정과 태도가 이 물건으로 전이되곤 한다. 즉 아이가 화병을 깬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거나 어머니와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며 이런 감정과 태도가 애꿎은 화병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는 의식적으로 화병을 밀어서 떨어뜨렸을 수도 있고 실수로 화병을 건드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에는 심층 심리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단순한 실수 또한 무의식이 우리를 충동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아이는 고의든 실수든 자기 무의식 속에 담겨 있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에 영향을 받아 화병을 밀쳐버렸다는 얘기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원초적 욕망의 부착을 중시했지만, 꼭 원초적 욕망이 아니라도 인간은 어떤 물건에 특정한 상황에서 느꼈던 정서나 특정한 기억을 부착하곤 한다. 그래서 여행 중 산 물건은 주로 여행의 행복과 관련되는 추억의 기념품이 된다. 물론 불행한 기억도 물건에 달라붙을 수 있지만 여행자는 불행할 때 물건을 잘 사지 않으므로 이런 걱정은 안 해도 좋을 것이다. 기분이 나쁠 때에는 기념품은커녕 그곳의 물건은 꼴도 보기 싫을 테니까 말이다.

여행 중 산 물건이 얼마나 큰 만족감을 주는지는 가끔 이런 기념품을 꺼내 볼 때마다 느낄 수 있다. 정말 별것 아닌 물건인데도 여행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오고 그곳에서 했던 여러 가지 행복한 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신기한 것은 기념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샀던 나라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특히 그 기념품을 샀던 가게와 구매 당시의 환경이 놀랄 정도로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점이다.

ⓒ연합뉴스여행지에서 산 물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여행 만족에 기여한다. 위는 타이 치앙마이의 우산 가게.

쇼핑을 통해 드러내는 여행자의 정체성

나는 잠시만 눈을 감으면 내가 기념품을 산 수많은 가게와 당시에 어떻게 흥정했는지 등을 정확히 그릴 수 있다. 나는 멋진 목걸이를 샀던 중국 랑무스 기념품 가게의 아담한 크기와 먼지가 쌓인 기념품들, 차가운 느낌을 주던 자연광 조명을 기억한다. 나는 10월의 몽골 울란바토르에 내리던 눈과 함께 동화나라 같던 그곳의 펠트 가게와 가게 벽에서 상영되던 펠트 만드는 법 동영상의 내용을 기억한다. 양작가의 파란 티셔츠를 샀던 치앙마이 옷가게의 나무 향기를 기억하고, 영어가 통하는 직원을 기다리며 영어를 못하는 주인아주머니와 함께 바라보던 인도 델리 파하르간지의 비를 기억한다. 어두운 저녁 시간에 불쑥 들어갔던 중국 쑹판의 모자 가게와 네팔을 떠나기 직전에 찾았던 포카라의 자수 티셔츠 가게도 생생하다.

기념품은 내 추억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고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쁘게 건네줄 물건, 그러면서 나의 여행을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물건을 찾아서 구매하는 재미는 남다르다.

우리는 쇼핑을 통해 자신의 여행자 정체성을 드러내 보일 수도 있다. 여행 가서 물건을 사면 우린 이를 여행할 때만 쓰곤 한다. 예를 들어 타이에서 타이 옷을 사서 가지고 오면 이 옷은 다음에 타이에 나갈 때에야 찾아서 챙기게 된다. 여행 중에 산 물건은 대체로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타이 옷을 사 입고 타이를 여행할 경우에는 자신이 타이 문화를 존중하고 있으며 다양한 정체성을 한 몸에 수용할 수 있는 개방적 여행자임을 표현할 수 있다. 옛 여행에서 산 낡은 티셔츠를 여행 나갈 때마다 꺼내 입는 것은 자신이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장기 여행자라는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어떤 가격대의 물건을 사는지, 흥정은 어떻게 하는지 등도 여행자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여행지의 쇼핑은 여러 이유로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활동이다. 특히 기억을 촉진하는 기능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능 등은 제품의 실용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행자들은 어떤 물건이 각 여행지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고유한 물건인지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찾아내서, 두고두고 여행을 추억하고 싶을 때 꺼내 보거나 두고두고 여행을 나갈 때마다 들고 나가도록 하자. 여행 기념품을 선물해준 사람을 동네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가 내 선물을 걸치고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분 상하지도 말자. 자신도 그런 걸 동네에서 하고 다니지는 않을 것 아닌가!

기자명 김명철 (심리학 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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