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고등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과도 고등학교 때로 기억을 돌려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의 가혹한 입시제도와 두발이나 복장 등 반인권적인 통제에 대해 말하면서 한국의 학교가 얼마나 힘든 공간인지를 토론하곤 한다. 재미있는 것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이야기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이런 말에 대다수 학생들이 공감을 했다. 학교생활에 소소한 재미는 있었지만 학교는 기본적으로 가기 싫고 힘든 곳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도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억지로 하면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어두운 곳으로 이야기되었다. 학교폭력의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학교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친구들일수록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했다는 ‘분노’가 컸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양상이 제법 바뀌었다. 자기들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부 시간이 졸리고 지루하지만 그냥 자면 된단다. 잔다고 야단치는 교사들이 간혹 있지만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고 다수의 교사가 깨우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을 하거나 염색을 하는 등 교칙을 위반하더라도 요령이 생겨서 적당히 피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학교도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눈을 감아주기 때문에 그리 통제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쁘지 않다’를 넘어 ‘재밌다’고까지 말하는 학생도 눈에 띄게 많이 늘었다. 자기들은 학교에 놀러 간다는 것이다. 학교에 가야 재미있다. 학교에 가야 친구들도 있고, 그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고 요새는 급식도 좋아져서 괜찮다고 한다. 한 학생은 밥도 주고, 잠도 자고, 친구도 있고, 그런데 왜 학교에 가지 않겠느냐고 능청스럽게 되묻기도 했다. 그 친구만의 특별한 이야기인가 싶어서 두루두루 물어봤더니 정말 ‘놀러’ 학교 가는 친구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박해성 그림

이처럼 교사나 학부모가 아무것도 안 할수록 학교가 어떤 학생들에게는 ‘갈 만한’ 곳이 되면서 당황하게 된 쪽은 부모와 교사들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고 공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곳인데 그냥 놀다 오는 곳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반면 진보적인 교사나 학부모는 학생들에게 억압적인 공간에 대해 학생들이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고 절망한다. 보수적이나 진보적인 양쪽 모두가 보기에 학교에 쉬러 오고, 자러 오고, 놀러 오는 이 친구들은 ‘가망’이 없는 존재 같다.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노력’하지도 않지만 진보 세력이 바라는 방식대로 ‘분노’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이 학생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학부모가, 교사나 교수들이 이 학생들을 보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외려 이들은 교사가 아무것도 안 할수록 ‘행복’해한다.

그 어떠한 ‘교육적 행위’도 모두 거부합니다?

이 학생들이 피곤해하는 것은 너무 열심히 하는 교사들이다. 지방에 있는 한 학교에 강의를 간 적이 있는데, 학기 초에 한 교사가 ‘제가 어떤 담임이 되었으면 좋겠는가’라고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한 학생이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지 마세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 교사는 충격을 받았다.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걸 거부한 것이다.

학교가 과거에는 가는 것조차 괴로운 곳이었다면 지금은 ‘공부만 안 하면 재미있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한 교사는 이에 대해 학생들이 “어떠한 교육적 행위도 거부”하고 있다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냥 재미있다고 말하는 학생들 역시도 드문드문 “재밌긴 한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요?”라고 불안감을 나타낸다. “뭔가 배우고 장래를 준비하긴 해야 하는데…”라고 말끝을 흐린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교육의 희망은 이런 교사의 당혹감과 학생의 말줄임표가 엇나가지 않고 만나는 순간 만들어질 것이다.

기자명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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