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하고 놀까


김은숙 작가님, ‘할리퀸’ 읽으시죠?


라이트노벨, 칙릿 소설, 할리퀸 로맨스의 세계

 

 

높은 시청률로 김은숙 작가의 존재를 알린 드라마 〈파리의 연인〉(2004)은 ‘사실 이 로맨스는 강태영(김정은 분)이 쓴 영화 시나리오였다’는 황당한 결말로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순정만화나 ‘라이트 노벨(Light Novel)’을 읽었던 이들(그러니까 적어도 나)은 놀라지 않았는데, 순정만화와 라이트 노벨의 가장 흔한 세계관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힘든 고비를 넘겨 이루어진 사랑이 모두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꿈과 현실의 이중구조.

시청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는 ‘열린 결말’로 치닫는 전형적인 〈구운몽〉 프레임은 꿈에서 깨어나면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 수행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인생의 허무함만 안겨주곤 했다. 열린 결말 말고 꼭꼭 닫힌 결말, 로맨스의 주인공을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완전히 꽉 닫혀서 열리지 않는 10만 년 된 통조림 같은 결말의 드라마는 없을까? 있다. 어쩌면 그게 온몸에 오소소 돋는 ‘닭살’을 떨어내가며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계속 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김은숙 작가가 〈시크릿 가든〉(2011)을 들고 나왔을 때 한참 비웃었다. 남녀 신체 바꾸기 판타지라니. 이미 1997년에 같은 소재의 영화 〈체인지〉가 나왔고 할리우드 및 일본 로맨틱 코미디물에서 예전부터 끊임없이 사용되던 너무나 ‘전형적인’ 판타지 아닌가. 시청자(그러니까 나)에게 먹혀들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크릿 가든〉이 방영을 시작하자 가랑비에 옷 젖듯 거품키스와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트레이닝복을 찬양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본방 사수했다. 특히 〈파리의 연인〉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브로맨스(남자들끼리의 친밀한 관계) 라인’이 연예인-작곡가 사이에서 드러났을 땐(물론 메인 스토리는 아니었지만) 김은숙 작가가 아무래도 어디 인터넷 공간에서 라이트 노벨을 쓰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시크릿 가든> <신사의 품격> <상속자들>(왼쪽부터). 칙릿 소설이나 순정만화 같은 이야기로 인기를 끌었다.

그다음 작품인 〈신사의 품격〉(2012)은 ‘칙릿 소설’의 모둠 버전이었다. 작가가 그 당시 나오는 19금 성인 연애소설 같은 걸 1000권 정도 보고 온 것 같았달까.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칙릿에서 흔히 보이는 캐릭터성 중 하나가 ‘사랑 같은 걸 믿지 않는 차가운 성격의 전문직을 가진,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 들지 않았으며 알고 보면 잊지 못할 첫사랑이 있지만 그와 별개로 아무 여자랑 만나고 테크니컬하게 헤어질 줄 아는 쿨한’ 남성과 ‘활발하고 예쁘지만 자기가 예쁜 줄 모르는 맹한 성격으로 바람둥이를 싫어하지만 결국은 나쁜 남자의 진심에 넘어가는,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가정사가 복잡하여 연애 따위 믿지 않는 아픈 과거가 존재하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하이틴 로맨스의 성인 버전으로, 쿨하지만 끈적거리는 성인용 로맨스다. 집어들기만 하면 미친 듯 몰입해서 읽을 수 있지만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은 온갖 클리셰(상투적인 문구나 진부한 표현)가 범벅돼 있는.

〈신사의 품격〉을 다 보고 난 후에는 거의 확신했다. 김은숙 작가는 어쩌면 정말로 어디선가 성인용 로맨스 소설을 집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속자들〉(2013) 방영이 시작되었을 때는 많은 사람이 〈꽃보다 남자〉(2009)를 떠올렸다. 개인적으로 그 드라마는 김은숙 작가가 쉬는 동안 순정만화 1000권쯤을 읽은 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는데, 그 안에 나오는 캐릭터 하나하나가 학창 시절 한 번씩은 읽어본 순정만화 캐릭터들을 모둠회처럼 모아놓은 기시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가는 가난한 잡초 같은 소녀, 어렸을 때 엄마에게 버림받고 우정과 사랑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 비뚤어진 소년, 소녀와 소년 사이에서 사랑과 우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브로맨스와 이성애적 관계를 동시에 집도하는 끝판왕 상속자, 예쁘고 당돌하지만 바람둥이 엄마가 있고 돈만 많아 결핍이 있는 가십 소녀…. 지난 10년간의 순정만화를 이리저리 모아놓은 그 드라마는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박신혜·김우빈·이민호를 그야말로 아시아의 상속자들로 만들어놓았다.

우리가 ‘김은숙 드라마’를 원하는 까닭

현재 방영 중인 〈태양의 후예〉(2016)는 ‘할리퀸 로맨스’의 모둠수육 같다. 육체파 군인인 남자 주인공과 연애 같은 거 별로 해보지 않은 활달하고 당찬 여주인공의 만남이 외국에서 이루어질 때는 다 이유가 있다. 1회 마지막 부분에 송중기가 헬리콥터에 오를 때, 2회 마지막에 송혜교의 목에 걸려 있던 스카프가 날아가 송중기 옆을 스쳐 지나갈 때 확신할 수 있었다. 할리퀸 로맨스의 표지는 항상 부러질 듯한 가냘픈 여성이 건장한 남성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니까.

이러한 전형적인 클리셰 범벅이 인기를 얻는 것은 익숙한 즐거움 때문이다. 산타가 없는 걸 알면서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행복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라이트 노벨, 순정만화, 연애소설, 할리퀸 로맨스 모두 꽉꽉 닫힌 행복한 결말로 치닫는 기승전결이 확실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김은숙 작가를 통해 대중에게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어쩌면 우리는 조금의 벌어진 틈도 용납하지 않는, 현실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감정을 모두 제거한 이야기를 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김은숙류’ 작품의 인기 뒤에는 이런 현실이 반영돼 있는지도 모른다.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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