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 중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영화가 있어. 이 영화에는 여러 가지 놀라운 면이 있지만 상당히 길고 독특한 프롤로그(?)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지. 인간의 아득한 조상, 즉 원숭이에 가깝던 인류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먹을 것이나 물을 두고 꺅꺅거리며 몸싸움이나 하며 생활했어. 그런데 하루는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한 원숭이가 짐승의 뼈를 집어들게 돼. 아마 넓적다리 뼈쯤 되겠지. 굵고 단단한.

이 원숭이는 이 뼈를 들고 자신들의 무리에 대적하는 원숭이를 때려눕힌다. 고무된 원숭이는 자신을 승리자로 이끈 자랑스러운 무기를 하늘 높이 던져 올려. 그런데 허공에 뜬 이 뼈다귀가 서서히, 당시로서는 수백만 년 뒤인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우주선으로 바뀐단다. 원숭이의 뼈다귀나 온갖 최첨단 제품이 들어간 기술의 총화인 우주선이나 결국 쓰임새는 같다는 메시지였지. 이기기 위해 동족을 죽이기 일쑤였고 평화보다 오히려 전쟁이 익숙했던 인류 발전의 역사를 그 한 컷으로 압축했다는 찬사를 받은 명장면이야. 죽지 않기 위해 또는 더 죽이기 위해 인간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한 차원 높은 문명을 건설할 지혜를 얻게 됐지. 오죽하면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렇게 말했겠니.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첫 장면(위)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하여간 뭔가 인간들 사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등장하면 그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적용되는 곳은 대개 전쟁터였다. 전쟁을 거치며 기술은 더욱 진보해서 다시 인간의 생활에 적용되는 기묘한 순환이 인류의 역사이기도 했어. 참치캔 같은 통조림은 ‘어떻게 하면 전쟁에 나간 병사들에게 오랫동안 상하지 않은 음식을 보급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의 소산이었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나 인터넷 등도 군사적 필요에 따라 개발된 거야. 동시에 전쟁과 전혀 관계없는 선의로 이뤄진 연구와 성과가 전쟁에 이용되는 일도 흔했지. 아마 라이트 형제가 그들의 원시적인 비행기로 하늘을 처음 날았을 땐, 자신들의 발명품이 수백만명의 목숨을 빼앗는 도구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거야. 반면 자신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전쟁에 활용하고자 노력한 과학자들도 많았지.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대표적 인물이야.

먼저 그는 인류의 은인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탁월한 과학자였어. 지력(地力)이라고 들어봤니? 농작물을 길러낼 수 있는 땅의 힘이야. 농사를 짓다 보면 양분을 빼앗겨서 아무리 기름진 땅도 제대로 된 생산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거든. 그래서 비료를 주는 거 아니겠냐고? 맞아. 그런데 비료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니 농사는 계속 지을 테고, 결국 땅을 못 쓰게 되어 사람들은 배를 곯게 된다. 옛날 사람들을 괴롭히던 기근의 원인 중 하나지. 특히 토양의 질은 질소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질소를 어떻게 공급해야 할지 몰랐단 말이야. 그래서 남아메리카에서 나는 인광석, 즉 바다새들의 배설물들이 쌓여 굳어진 암석에서 질산염을 추출하여 질소비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광석은 새똥이 오랫동안 쌓여서 만들어진 퇴적물인 만큼 공급량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어.

그때 혜성같이 나타난 사람이 바로 프리츠 하버였다. 그가 인공적으로 질소비료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거든. 공기 중의 질소를 수소와 화합하여 얻은 암모니아가 질산과 반응하면 질산암모늄으로, 황산과 반응하면 황산암모늄으로 바뀌는데 이게 인공 질소비료의 중요한 원료가 됐다.

사람들은 환호했어. “공기에서 빵을 만드는 사나이”라는 찬사가 하버에게 쏟아졌고 20세기의 연금술이라는 찬사를 받았지. 이제 지력을 높이기 위해 땅을 놀릴 이유가 없게 됐어.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일도 그만큼 쉬워졌다. 그 덕분에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농작물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게 됐으니, 이런 위대한 발명이 또 어디 있겠어. ‘기쁘다. 비료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세상이 다 일어나 하버를 찬양할 만했지.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왼쪽에서 두 번째)는 살상 무기로 쓸 독가스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다.

아내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전선으로 떠난 과학자

그런데 이 인류의 구세주(?) 하버는 그 지식 때문에 죽음의 사자로도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유대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조국 독일의 열렬한 애국자였어. 1차 대전 중 하버는 독일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정력을 짜낸다. 자신의 화학 지식을 총동원해서 화약의 원료인 질산 제조 방법을 개발해낸 거야.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인정할 만해. 프랑스의 과학자 파스퇴르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으나 과학자에겐 국경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버 역시 조국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거잖아. 그러나 하버의 과학적 천재성과 화학적으로 결합된 열렬한 애국심은 결국 그를 끔찍한 살인 도구의 개발자로 몰아가게 된다. 바로 독가스였지.

하버가 독가스를 처음 발명한 건 아니야. 독일만이 독가스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하버가 화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좀 더 사용하기 쉬운 독가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건 사실이야. 독가스라는 무기의 비인간성에 독일 장교들도 우려를 표했지만 그의 대답은 이랬다. “포탄을 맞아 죽으나 독가스에 죽으나, 죽는 것은 똑같다.” 얼핏 맞는 말 같기도 하지만 동조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

이 ‘애국 과학자’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바로 그의 아내였어. 클라라 임머바르. 그녀 역시 유능한 화학자였다. 그러나 결혼한 뒤엔 현모양처를 바라는 남편 하버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연구를 접어야 했어. 남편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희생해야 했던 수많은 불운한 여성 가운데 한 사람. 하지만 그녀는 한 사람의 화학자로서 남편의 독가스 연구에 공개적으로 반대해. “과학자에겐 생명에 대한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는 규율이 있다. (독가스 개발은) 과학자의 이런 규율을 타락시키는 야만성의 상징으로, 과학의 이상마저 왜곡한다.”

그러나 프리츠 하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하버는 그의 신제품 독가스 발명 축하연에 참석한 뒤 그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동부전선으로 출발하게 됐어. 바로 그 축하연이 있던 날 남편과 심하게 다툰 클라라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버려. 아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 열렬한 애국자 프리츠 하버는 러시아인들을 죽이기 위해 동부전선으로 떠났지. 인류를 구한 위대한 금자탑은 수만명의 목숨으로 세워진 해골탑이 됐고 하버는 인류의 역사에 두 얼굴의 과학자로 남게 돼.

지난 며칠 동안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화제였지. 처음의 예상을 뚫고 인공지능 알파고는 놀라운 집중력과 분석력을 발휘하며 바둑 천재 이세돌 9단을 4승1패로 꺾는 기염을 토했어. 아빠는 “누가 이기든 인류의 승리”라고 한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의 말에 공감했다. 그러면서도 위대한 인류의 ‘승리’인 저 알파고가 바둑 같은 인간에게 유용한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전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악용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어. 십중팔구 어떤 사람들은 이 인공지능의 놀라운 능력을 어떻게 하면 ‘승리’에 활용할 수 있을까 연구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게 역사였으니까!

하지만 남편이 가는 길에 죽음으로 항의했던 또 한 명의 과학자 클라라 임머바르의 말을 곱씹으면서 치솟는 불안감을 달래게 된단다. “과학자는 생명에 대한 통찰을 지녀야 한다.”

맞아. 항상 그렇게 해왔다고 앞으로도 당연히, 또 별수 없이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한다는 법은 없을 거야. 인류도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법을 학습해왔을 테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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