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디플레이션 공포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자 임금 올려 디플레이션 해결하자”
 

통화정책의 최종 버전, 마이너스 금리
 

통화정책 지고 재정정책 뜰까
 

‘헬리콥터 머니’가 주목받는 이유

 

‘통화정책의 독재’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월24일 낸 보고서에서 “세계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G20 국가들은 재정지출 여력을 활용해 공공투자를 확대하는 공조계획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난 2월26~27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도 “모든 정책 수단(all policy tools)”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수사가 등장했다. 그동안 세계 각국이 통화정책을 사실상 ‘유일하게 정당한’ 불황 대책으로 운용해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젠 재정정책도 과감하게 사용해달라’는 권고로 해석할 수 있다.

불황기의 통화정책은 금리 인하로 경기를 부양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금리를 내리면 기업과 가계 등 경제주체들이 더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빌려 투자하고 소비할 수 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금리가 인하될 경우 모두 혜택을 본다. 그러므로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특정 계층으로부터 인기를 끌기 위해 악용할 ‘선심성 정책’으로 사용되기 힘들다. 더욱이 통화공급량을 늘리고 금리를 내려도, 정부가 부채를 지는 일은 없다.

이에 비해 재정정책의 경우, 정부가 특정 산업 부문이나 계층, 복지, 공공 인프라 등에 직접 재정을 투입한다. 그만큼 경기에 미치는 영향도 직접적이다. 그러나 정치인이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목표로 악용할 소지가 크다. 가장 큰 문제는 세입(정부의 수입)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빌려서(국채 발행) 지출하는 과정에서 정부 부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2010년 전후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 남부 국가들의 국가부도 위기 이후 정부 부채 문제는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미국 오바마 정부의 경우, 정부 지출 규모를 공화당의 반발에 따라 크게 줄이는 상황에 처하면서 당초 계획한 전 국민 건강보험 등 복지제도를 축소해야 했다. 이런 세계적 추세로 인해, 2010년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 정부들은 통화정책 일변도로 불황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노령화와 불황으로 빈곤층이 늘어나면서 정부 지출은 ‘자동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재정정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재정정책을 불황에 대처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 수단으로 제시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Xinhua2월26~27일 중국 상하이에서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불황 대책으로 재정정책의 과감한 사용을 권고했다.

문제는 통화정책이 불황 극복에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기준금리 0%’에 이어 엄청난 규모의 양적완화가 시행되었고, 최근에는 일부 국가에서 마이너스 금리 제도까지 도입했다. 모두 통화정책이다. 그런데도 실물경기는 움직이지 않고, 따라서 물가도 오르지 않는다. 그동안의 통화정책 일변도에 대한 회의감이 조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제 불황에 통화정책이 무용해진 까닭

이와 관련해, 각국 정부가 재정정책을 무시했기 때문에 불황이 극복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온 리처드 쿠 일본 노무라연구소 수석연구원의 주장이 관심을 끌고 있다. 리처드 쿠는 최근 고객들에게 보낸 연구 보고서에서 마이너스 금리를 “양적완화로도 ‘물가인상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각국 정책 당국의) 절망감에서 나온 자포자기적 행위”로 몰아붙이며 “정책 당국은 (경제학) 교과서의 가정들을 맹종하느라 실물경제를 계속 무시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쿠가 생각하는 경제학 교과서의 오류는 무엇인가?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민간 기업들의 목표는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나 ‘이윤 극대화’다. 또한 경제주체들은 금리가 충분히 낮다면 기꺼이 돈을 빌려 투자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쿠는 글로벌 경제 차원에서 지난 10여 년에 걸쳐 이 같은 기본 원리들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잇따라 터진 크고 작은 금융위기들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경제가 급격한 성장을 거듭해온 것은 사실이다. 이 같은 성장에 큰 몫을 한 것이 바로 부채였다. 금융 시스템의 발전에 따라 경제주체들은 자기자본보다 남의 돈을 빌려 활발히 투자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성장이 촉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금융위기가 터져버리면 부채로 번성했던 기업들이 엄청난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10억원을 빌려 부동산에 투자했다고 가정하자. 금융위기가 터지면, 모든 경제주체는 부도를 면하기 위해 유동성 높은 현금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다.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의 가격은 폭락한다. 그러나 부채는 고스란히 남는다. 이 기업의 경우, 부동산 가격이 5억원으로 떨어졌다면, 부동산을 팔아 5억원을 갚은 뒤 나머지 5억원의 부채를 상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쿠에 따르면 거의 모든 민간 경제주체들이 부채로 자금을 조달해서 투자하다가 부도 위기를 맞는 경험을 겪었다. 이런 충격은 상당 기간 지속된다. 결국 민간 기업들은 본연의 임무인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부채 최소화’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아무리 금리가 낮아도 돈을 빌리려고 하지 않는다. 쿠는 “전통적 경제학들은 우리가 2008년 이후 살고 있는 종류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했다. 서구 경제에서 1940년대(거시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나타났던)와 2008년 사이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EPA리처드 쿠 노무라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금융위기로 인해 경제학의 기본 원리들이 변화되었다며 재정정책을 강조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통화정책은 무용하다. 아무리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고 많은 유동성을 공급해도 정작 경제주체들이 돈을 빌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를 통해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한다고 해도, 그 돈은 일반은행에 들어가 보유금(reserve) 형태로 고여 있을 뿐이다. 기업이나 가계가 일반은행에 가서 대출해야 고여 있던 보유금이 실물경제로 투입되어 경기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 실제로 쿠가 제시하는 여러 나라의 자료를 보면,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에 공급한 통화(본원통화)는 엄청나게 증가한 반면 ‘실제로 민간이 빌려 사용한 돈’의 지표는 거의 증가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일반은행들은 자행 내부에 보유금 형태로 고여 있는 돈을 실물경제가 아니라 금융자산이나 부동산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은행이 실물경제를 부양한다는 명목으로 새로 찍어낸 돈들이 금융 시스템 내에서만 돌아다니며 외부(실물경제)로는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적완화 이후 주식시장은 호황을 누렸지만 정작 실물경제는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유다. 상황이 이러하니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쿠는 재정정책을 강조한다. 양적완화 같은 강력한 통화정책이 작동되지 않는 이유는 실물 부문의 경제주체들이 돈을 빌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양적완화로 발행된 돈을, 무력한 민간 부문 대신 빌려서 경제 전반에서 파급력 높은 부문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한동안 정부 지출로 경기를 안정시켜 민간 소득을 유지해야, 민간 부문이 비로소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투자와 소비를 본격화하는 호황 국면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 쿠의 주장이다.

다만 이 같은 ‘재정정책의 복권’이 현실에서 쉽게 이뤄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에서는 정부 지출 확대를 법률적으로 제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재정긴축 세력’이 다수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 더욱이 2008년 이후 선진국들의 국가 부채가 크게 증가한 상태라 시민들을 설득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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