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은 서양 사람들에게 ‘은자(隱者)의 왕국(Hermit Kingdom-W. E. 그리피스의 표현)’, 즉 은둔하며 사는 이들의 왕국이라고 불렸단다. 그만큼 조선은 서양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어. 물론 천주교 신도가 수만명에 이르렀고 프랑스 신부도 이 땅에 들어왔다가 죽음을 당하기도 했으니 완전히 깜깜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외국 여행객이 조선 팔도를 팔자 좋게 여행하거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던 건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뒤에야 가능했지.

조선을 찾았던 호기심 넘치는 서양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한 게 하나 있어. 조선인들이 신체적으로는 이웃 나라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거였지. “한국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라거나 “나는 주저하지 않고 조선인이 극동에서 가장 잘생긴 민족이라고 단정한다. 그들은 키가 크고, 선이 굵으며, 강인하고, 힘이 세며, 항상 균형이 잘 잡혀 있다”(님 웨일스의 책 〈아리랑〉)는 칭찬을 들으면 왠지 아빠를 얘기하는 것 같아서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그 칭찬 뒤에는 으레 상당한 험담이 뒤따랐단다. “우수한 체력에 비해 정신력은 그에 못 미치는데, 그들은 분명 최상의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마치 너울처럼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카를로 로제티의 책 〈꼬레아 에 꼬레아니〉).

ⓒ역사편찬위원회1919년 3월1일 서울 덕수궁 앞에 모인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그들은 “머리 하나는 더 큰”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이 펄쩍 뛰어올라 때리는 뺨따귀를 맞고 징징대는 희한한 풍경에 혀를 내둘렀고 작달막한 일본인들 앞에서 훤칠한 한국인들이 허리와 머리를 굽히고 조아리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경멸의 시선을 던졌던 거야. 이런 기사 한번 볼까? “한 사람이 오줌을 누다가 일본 순사에 붙잡혀 뺨을 맞고 의관을 다 찢겼을 뿐만 아니라, 땅에 눈 오줌을 도로 먹게 하여 무수한 곤욕을 당했다”(1909년 2월12일자 〈대한매일신보〉). 상상해보렴. 네가 눈 오줌을 다시 핥으라고 호령하는 일본 경찰과 개처럼 엎드려 그걸 핥으며 울상 짓는 한 조선 아저씨의 모습을. 그걸 서양 사람들이 봤으면 어땠을지를.

의병들의 장렬하지만 산발적이었던 저항 외에는 이렇다 할 국가 간 전쟁 하나 없이, 스리슬쩍 자칭 하나의 제국(帝國)이 이웃 나라에 속수무책으로 먹혀갔던 과정은 더욱 한심하게 보였을 거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말은 그것을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어.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어느 나라가 대신 해주겠는가.” 그들에게 조선은 그리고 대한제국은 망해 마땅한 나라였어. 지배층은 나라건 뭐건 제자리 지키고 호의호식하는 게 우선이고, 백성들은 지배층의 탐욕과 가난에 짓눌려 뭘 해볼 기력도 사라진, 답 없는 노예의 나라였던 거지.

ⓒ연합뉴스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의 옥중 사진.

그렇게 나라가 망한 뒤 9년이 흘렀고 1919년 기미년이 왔을 때까지도 그 괴로운 어둠은 여전히 한반도 전역에 깃들어 있었어. 예를 하나 들어주면 ‘조선 태형령’이라는 게 있어. 즉 봉건 잔재로 치부돼 갑오개혁 이후 공식적으로는 폐지된 태형, 즉 매질을 조선 총독부는 ‘조선 태형령’으로 부활시킨 거야. 이 태형은 일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조선인에게만 국한됐지.

“조선놈들은 때려야 말을 들어.” 아빠도 자라면서 종종 들었던 이 말은 일본 순사들이 삐딱한 조선인들 잡아다가 몽둥이찜질을 하면서 내뱉는 관용어였어. 조선 태형령이 공식 선포된 건 1912년 3월. 그 이후 주재소마다 경찰서마다 때리는 소리와 맞는 비명이 드높았고 그 꼴을 보는 서양 사람들은 또 한 번 고개를 저었을 거야. “하여간 코리언들은 명예가 뭔지 긍지가 뭔지도 몰라. 일본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꼼짝 못하는 꼬락서니 좀 보라지.”

그러나 경술국치 후 9년, 조선 태형령 후 7년이 지났을 때 식민지 조선 사람들은 마침내 거대하게 일어선다. 바로 1919년 기미년 3월1일 터져 나온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야.

총독부 발표로 2000만 한국인 중 200만, 미국이건 러시아건 중국이건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거의 모든 곳에서 대한독립만세가 터져 나왔어. 그제야 한국 사람들은 ‘인간’의 얼굴을 세계에 노출하게 된 거야. 한국인들은 결코 노예에 적합한 인종이 아니며 한때 노예처럼 무기력했을망정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용감하고 존엄한 인간으로 주먹을 부르쥘 수 있음을 보였던 거지. 식민지 조선에서 생활했던 엘스펫 로버트슨 스콧이라는 영국인은 3·1 항쟁 이후 투옥된 여학생을 면담한 기억을 이렇게 쓰고 있어.

“학교에서 루스라고 불리는 이 여학생은… 기품이 고고한 얼굴이었고… 슬픈 표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환희에 넘친 표정이었다. 여학생은 왜 자기가 학교의 명령을 어기고 독립운동에 참가했는지 또 어떻게 체포되었는지 말했다. (…) 동정을 구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승리한 자의 모습이었다”(〈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1920~1940〉 송영달 옮김, 책과함께 펴냄).

3월1일이 없었다면 8월15일이 있었을까

비슷한 여학생이었으며 너도 잘 알 유관순을 떠올려보자. 16년쯤 전 아빠가 촬영차 만났던 유관순의 동기 동창 할머니의 말을 아빠는 선명히 기억해. “관순이는 불쌍한 사람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어. 뭐라도 쥐여주거나 덮어줬지. 우스갯소리도 잘하고 얼마나 명랑했다고. 화가 나면 충청도 사람답잖게 말도 따다다다 쏴대기도 했고.” 그녀는 기도 시간에 별안간 ‘주 예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좋아하는 반찬이었던 ‘명태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천연덕스럽게 읊어대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명랑한 보통 소녀였어.

그런 평범한 소녀가 고향의 어른들을 불러 모으고 용기를 불어넣고 만세를 주도하고 후일 재판정에서 판사에게 의자를 집어던졌던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을까. 아빠는 음력 3월1일, 양력 3월31일 매봉산 정상에 선 유관순의 얼굴에 답이 있을 것 같아. 자신이 봉화를 들어 올릴 때 일제히 인근 스물네 곳의 산봉우리에서 불길이 솟는 것을 보고 유관순의 표정이 어땠겠니.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다리 저리는 줄도 모르고 “조선 만세”를 부르짖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지 않았을까. 스콧이 봤던 “환희에 넘치는 승리자의 표정”으로 말이야. 이 에너지는 수백만 한국인을 움직였고 한때 일제에 투항했던 일부 사람들까지도 돌려세운다. 일제로부터 자작 칭호를 받았던 이용직은 조선 총독부에 이렇게 선언했거든. “너희가 군함의 무력을 자랑하지만 우리의 만세 부르는 정신은 분쇄하지 못할 것이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에너지가 넘칠 때 역사는 융기하고 폭발하고 새 시대를 열어줘. 장담하는데 3월1일이 없었으면 8월15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야. 반면 그 에너지를 끝내 발휘하지 못하고, ‘실력 양성’에 매진했다면 우리는 지금 ‘곤니치와’와 ‘사요나라’를 되풀이하며 살고 있을 것이고 한국어는 언어학자들이 연구하는 사어(死語)나 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신기한 언어가 돼 있을지도 몰라.

다시 돌아온 3월, 아빠는 생각해본다. 우리는 그 에너지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을까, 아니면 덩치는 큰 주제에 뺨 맞고 울기나 하고 외세를 이용한답시고 그들 좋은 일만 시키던 시절의 암울한 에너지 방전 상태에 있는 것일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