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하고 놀까


내 손으로 키운 ‘아이돌’


아들도 한번 키워볼까 해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이 있다. PC용 게임으로 시작해서 모바일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 게임은 1991년 최초로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개척해냈다. 게임 속 딸을 다양한 방식으로 육성시키는 게임이다.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가 연이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게임 플레이를 통해 발생하는 딸과의 다양한 정서적 감응 때문이 아니었을까. 게이머들은 플레이를 통해 딸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바캉스를 즐기기도 하며 자라나는 딸에게 애정, 슬픔 혹은 (내가 원하는 엔딩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 등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은 게임의 이야기 진행 방식이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게이머에게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면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게이머는 적어도 마우스를 클릭하는 등의 아주 작은 행동을 통해, 게임의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는 우리가 행위하고 조작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나 친밀감 같은 정서적 교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기제가 된다.

ⓒM.net엠넷의 <프로듀스 101>은 101명의 소녀 중 걸그룹 최종 멤버 11명을 뽑아 데뷔시키는 프로그램이다.

엠넷의 〈프로듀스 101〉은 이러한 측면에서 〈프린세스 메이커〉가 가진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장점을 차용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프로듀스 101〉은 시청자들을 ‘국민 프로듀서’로 호명하며 걸그룹 최종 멤버 11명을 선택하게 하고, 데뷔 싱글의 프로듀싱에도 시청자들이 참여토록 하는 콘셉트이다. 그야말로 ‘아이돌 메이커’ 프로그램이다.

장근석이 “쇼타임!”을 외치며 101명의 소녀들(이라기보다는 소녀 떼에 가까운)을 소개할 때만 해도 서바이벌과 리얼리티를 가장한 ‘엠넷 드라마’는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전형적인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소녀들의 동영상을 재생하고, 홈페이지에 들러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내가 밀고 있는 소녀들에게 투표하며, 마음속에 리스트업된 소녀 11명을 SNS로 홍보까지 하고 있다.

연습생 완전체라 말할 수 있는 김세정이, 연기자를 꿈꾸며 노래와 춤 연습은 거의 해보지도 않은 김소혜를 이끌어주며 백합처럼 청초한 우정을 만들어나갈 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그뿐이랴.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닌데도 순위 발표에서 극적으로 1위를 차지한 김세정이 울면서 “엄마, 오빠, 우리 셋이서 참 바닥부터 힘들게 살아왔는데, 앞으로 꽃길만 걷게 해드리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프로듀스 101〉은 단순한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아니라, 데뷔를 향해 달려 나가는 101명의 우정과 성장, 그 대서사시의 시작이다.

일본 걸그룹 AKB48 총선거 콘셉트와 유사

사실 〈프로듀스 101〉은 일본의 유명한 걸그룹 AKB48 총선거 콘셉트를 그대로 가져온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AKB48을 기획한 아키모토 야스시는 2010년 일본 니혼TV와 한 인터뷰에서, AKB48의 멤버들은 다른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 그룹과는 달리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성장의 서사를 그룹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힘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프로듀스 101〉도 마찬가지다. 시청자들(혹은 국민 프로듀서들)은 101명의 연습생이 점차 무대 경험을 쌓아가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며 투표와 다양한 팬 활동을 바탕으로 ‘아이돌 메이킹 시스템’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의 존재이며, 이미 정식으로 데뷔한 아이돌에 비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그로 인해 팬들은 자신이 직접 ‘아이돌’을 육성하는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프로듀스 101〉에 속해 있는 소녀들 중 대형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연습생들의 성장이나 순위 변동에의 서사는 다른 멤버들의 것보다 훨씬 극적이다.

물론 엠넷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드라마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악마의 편집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기제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멤버들에게 부여하는 캐릭터다. 개인의 탤런트와 개성을 살펴볼 수 있는 ‘일인직캠’이나 ‘자기소개 영상’과 같은 장치에서부터, 매회 우정이나 갈등·성장을 조장하는 서사 방식은 매우 전형적이지만 그래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다시 만난 세계’를 열창하며 55위에서 단숨에 12위로 뛰어오른 스타쉽 소속 유연정의 등장은 이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성장 드라마’가 완결된 형태가 아닌 캐릭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어차피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을 거야’라는 대중의 인식을 깨트린 것이다.

그러나 게임은 ‘결말’이 정해져 있다. 물론 게임에서의 결말이 영화나 드라마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되지 않고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여러 개의 엔딩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엔딩은 결국 그 게임을 만든 게임 제작자의 엔딩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머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자신이 그 게임의 엔딩을 직접 ‘만들어나간다’는 느낌을 공유한다. 우리는 〈프로듀스 101〉의 진짜 프로듀서는 아니지만, 아이돌로 데뷔하기 위한 소녀들이 성장하는 시간을 공유한다. 그들의 성장 시간에 대한 공유와 감정적 서포트는 이미 우리를 단순한 시청자가 아닌 소녀들의 ‘프로듀서’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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