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로 인해 요 며칠 흥분이 가시지 않고 있다. 100여 명의 야당 의원이 공히 4시간 이상을 감당해야 테러방지법 2월 회기 통과를 막아낼 수 있고, 여당과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3월 회기를 막아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력은 상당하다. 가장 큰 파장은 야당의 분열과 무능력에 분노하던 지지층의 결집이다. 젊고 능력 있는 정치인의 존재를 알린 김광진 의원의 첫 토론에서부터 모두가 주저하던 첫날 밤을 헌신성으로 채워넣은 은수미 의원의 밤샘 토론에 이르기까지 야당 의원들의 결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보수 신문과 종편에 의해 매도되었던 바로 그 종북주의자, 운동권, 무능력자들의 현주소라는 점에서도 시사점이 분명하다. 각각 몇 시간씩 토론이 이어지는 힘든 과정 속에서도 핵심 쟁점들을 찬찬히 설명해주는 모습에서 전문성으로 다져진 그들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한심한 과격분자에 싸움꾼 패거리로 매도되기만 했던 그들의 애로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팩트TV와 국회방송의 힘이 컸다. 편집 없이 계속된 실시간 방송은 테러방지법의 쟁점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창구 구실을 하고 있다. 학습능력이 뛰어난 우리 국민의 체질을 고려하면, 테러방지법이 ‘국정원 권한 강화법’이라는 정도는 이해하고도 남았으리라 보인다.

국회 안에서 누가 막말을 하고 누가 무례를 범하는지 날것으로 보여준 것도 예상치 못한 성과였다. 여당의 일방주의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위협적인지 보여주는, 말 그대로 생방송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주류 언론에 제대로 실릴 수 있는 환경이라면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지겠나. 필리버스터의 현장은 이처럼 언론에 의해 무뢰한도, 영웅도 될 수 있는 드라마틱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는 역으로 보수 정권이 언론 장악에 온 힘을 기울여온 이유를 설명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종편의 도입, KBS·MBC의 지배구조 보수화는 오로지 정부·여당과 대통령의 관점에서 국회를 재단하고 논평하는 방송 시스템을 합법적으로 구축해온 과정이다. 그 결과 야당은 이제껏 정쟁과 무능력에 빠진, 민생 외면의 존재로 왜곡되어왔다. 그런 그들의 다른 면모가 필리버스터 과정에서 여과 없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담아내고 해석하는 주류 언론의 부재 때문이다. 이처럼 주류 언론의 부재가 오히려 공정성을 담보하는 결정적 장치라는 사실은 기레기 논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현실이다.

청정 지역으로 여겨지던 EBS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이루어진 EBS 감사 선임 소식은 매우 유감이다. 이는 마지막 청정 지역으로 여겨지던 EBS에 대한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EBS 감사로 선임된 인사는 교학사 교과서의 보급을 적극 옹호하고 뉴라이트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해온 〈동아일보〉 출신 인사다. 이 때문에 이명희 사장 후보가 선임되지 못한 데 대한 대응 인사라는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신임 우종범 사장 선임 이후 넉 달이나 지연되다 갑자기 진행된 인사라는 점, 방송 전문성도 교육 전문성도 갖추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은 그동안의 감사 선임 사례에 비추어볼 때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이어진다.

이뿐만 아니다. 최근 EBS 라디오에서 시작된 〈코리안 미러클〉이라는 낯선 다큐 드라마는 교체된 이사회와 사장의 행보를 주시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책을 읽는 라디오, 외국어 교육방송을 표방하는 EBS 라디오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낮과 밤, 일요일까지 본방·재방·삼방을 거듭한다. EBS와 KDI(한국개발연구원)가 공동 제작했다는 이 드라마는 무려 100부작에 이르는데, ‘절대 빈곤과 싸워야 했던 시절, 오늘의 경제대국 대한민국 경제 70년을 조명한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있다. 최근 에피소드에는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무지한 관료들 사이에서 오로지 한 사람의 지도자만이 빛을 발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아무도 고속도로를 모를 때 고속도로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유일한 인물임이 강조된다.

이는 시민사회단체가 그토록 우려했던, EBS를 활용한 현대사 교육의 출발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육방송이 대통령이 원하는 현대사의 전달 창구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보수 정부하에서는 우려가 우려로 끝나지 않고 끝내 현실로 나타나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모두가 언론 감시에 적극 나서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기자명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책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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