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심리학 4회(〈시사IN〉 제437호 ‘가난을 소비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기사 참조)에서 우리는 여행지의 낯선 문화가 인간의 정신에 창조의 영감을 불어넣고 즐거움을 주는 과정을 탐구했다. 그런데 여행지의 낯선 문화가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신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여행지가 주는 부정적 경험이 반면교사가 되어 우리의 삶을 훨씬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것은 내가 겪은 강렬한 ‘반면교사 여행’ 이야기다.

나와 내 여행 동반자인 양 작가는 2010년 1월 초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공항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던 우리에게 멋진 콧수염에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I am the information.” 정보님께서는 아무리 보아도 우리를 호객하려는 택시 기사인 듯했고, 우리는 “아, 우리 정보 많이 알아요”라고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렇게 내 생애 최고의 여행 중 하나로 기억될 스리랑카 여행이 시작되었다.

한 달간 우리는 스리랑카의 짙푸른 자연, 모퉁이만 돌면 나오는 아름다운 폭포, 좋은 사람들, 세상에서 제일 매운 커리 등 스리랑카를 한껏 즐겼다. 그리고 어디를 가나 한적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외국인 여행자를 한 명도 찾아보기 힘들 때도 있어서 마치 스리랑카라는 나라가 오직 우리의 여행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한적함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당시 스리랑카의 정치적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정치 상황 또한 스리랑카 여행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스리랑카 관광청스리랑카의 바위요새 시기리야의 꼭대기에는 옛 궁궐터와 주거지, 수영장 등이 남아 있다.

고백하자면 우리는 스리랑카라는 나라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채 도착했다. 뭔가 독특하다는 것을 처음 느낀 것은 현금인출기로 스리랑카 돈을 뽑았을 때다. 돈이라 하면 세종대왕이나 간디나 조지 워싱턴 같은 역사적 위인과 지도자가 한 면에 나오고 반대쪽에는 소나무나 공작새, 에베레스트 같은 각 나라의 상징이 나오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스리랑카 돈에는 현직 대통령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가장 큰 돈에서 가장 작은 돈까지, 모든 지폐에.

그의 이름은 마힌다 라자팍세. 라자팍세가 대통령이 된 2005년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스리랑카의 다수 민족 신할리와 힌두교를 근간으로 한 소수민족 타밀 공동체 사이의 수십 년 내전이 2004년 쓰나미 때문에 소강상태에 접어든 때였다. 라자팍세는 온 스리랑카가 자연재해에 허덕이고 있을 이때가 타밀 반군을 끝장내기 가장 좋은 때라고 판단했다. 라자팍세는 타밀 반군 지역에 대한 쓰나미 복구 지원을 중단하는 등 민족 간 갈등을 다시 고조시켰고, 갈등이 무력 충돌로 번지자 이를 구실로 전쟁을 재개했다.

ⓒEPA스리랑카의 마힌다 라자팍세 전 대통령은 국제사회로부터 전쟁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그리고 2009년, 라자팍세는 타밀 반군의 수뇌부와 극렬 저항세력을 싹 쓸어버리고 남은 반군들에게는 뇌물을 먹여 스리랑카의 내전을 종식시켰다. 우리는 라자팍세가 ‘평화’를 이룩한 업적을 앞세워 2010년 1월27일 재선에 도전하던 그때에 스리랑카를 찾은 것이다. 우리의 눈에 비친 라자팍세는 구원자를 자칭한 전범이었고 해방자를 자칭한 독재자이며 선동가였다. 그는 스리랑카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을 나팔로 활용해 일방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선전하게 만들었다. 신문에는 연일 상대 당 후보인 폰세카(라자팍세의 오른팔로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인물)가 당선되면 다시 내전이 터질 것이라는 예측이 실렸다. 심지어 라자팍세는 ‘대통령’으로, 폰세카는 ‘장군’으로 지칭되고 있었다. 평화냐 전쟁이냐!

“스리랑카에 대한 국제적 음모를 반대한다”

텔레비전 방송 중간 중간에는 라자팍세가 국사에 전념하느라 깊은 생각에 빠져 있거나, 타밀인과 만나 함박웃음을 지으며 포옹하거나, 타밀 반군의 잔당이 그에게 환호하는 모습을 편집한 장엄한 뮤직비디오가 방영되었다. 마을 곳곳에는 라자팍세가 두 팔을 벌리고 환호하는 모습을 담은 거대한 선전용 사진이 걸려 있었고, 도로 위에는 라자팍세를 연호하며 북을 치고 깃발을 흔드는 젊은이들로 가득 찬 국영 버스가 긴 행렬을 이루었다. 2009년 종전하기 직전에 타밀 반군과 민간인 수만명이 학살당했다는 유엔의 주장이 나오자 라자팍세는 젊은이들을 시켜 각국 대사관 앞에서 “우리는 스리랑카에 대한 국제적 음모에 반대한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게 만들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정말로 라자팍세에게 환호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라자팍세는 용감한 사람이다” “라자팍세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평화가 이루어질 거다”라고 말했다. 나라 전체가 내전 종식이 가져다준 희망과 낙관주의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라자팍세는 이런 분위기를 한껏 활용하기 위해 이벤트를 벌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포탄이 날아다니고 총알이 빗발치던 1번 국도(‘로드원’)의 바니 정글 지역(내전 종반 가장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지역)을 개통해, 타밀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 최북단 도시 자프나에 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나와 양 작가도 여행자들이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자프나에 가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일단 바니 정글 지역 남쪽 끝에 위치한 도시 보냐로 갔다. 우리는 보냐 버스 터미널이 자프나행 버스를 잡아타려는 타밀인들로 가득 찬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버스를 가득 채우다 못해 문 손잡이에 두세 명씩 매달려 자프나로 향했다. 우리는 버스보다 좀 더 비싼 밴 한 대를 찾아내 몸을 실었다. 밴이 바니 정글로 접어들자 포탄 자국으로 흉하게 뚫린 벽들과 무너져 내려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참혹하고 슬픈 광경이었지만 함께 탄 타밀 사람들은 마냥 들뜬 표정이었다.

밴은 바니 정글의 남측 검문소로 접어들었다. “내려서 뭐 해야 해요?”라고 묻는 우리에게 운전사는 “아무것도! 그냥 있으면 돼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밴에 다가온 군인은 우리의 불안한 예상에 꼭 들어맞는 행동을 했다. “거기 두 분은 저를 따라오세요.” 우리는 그를 따라서 장교들이 있는 텐트로 걸어 들어갔다. 중위 한 명과 대위 한 명은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리랑카 관광청스리랑카 동부의 아루감 베이는 오랜 기간 타밀 반군의 점령 지역이었다. 아름다운 해변은 여행자들에게 최고의 서핑 포인트로 꼽힌다.

중위 쪽이 우리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로드원이 스리랑카인에게 개통된 것은 맞지만 외국인이 바니 정글을 통과하려면 콜롬보에 있는 스리랑카 국방부가 발행한 허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장했다.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안 했다고요. 국영 여행 안내소 직원도 그런 말 없었고 국영 버스 터미널 직원들도, 아무도요. 그리고 여기서 보냐까지는 어떻게 돌아가라는 거예요? 걸어서 갈까요?” 중위는 우리를 밴까지 배웅해준 다음 운전사에게 강압적인 목소리로 뭔가를 지시했다. 운전사는 당황한 얼굴로 차에 타서 말했다. “보냐로 돌아가서 두 사람을 내려주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밴 안에 탄 타밀 사람들은 털털하게 웃었다.

투표일 저녁, 전화와 교통편이 모두 끊기다

보냐로 돌아온 우리는 이제 숙소를 구해야 했지만 빈 방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어떤 숙소의 주인에게 물었다. “오늘이 로드원 개통일이라 그런가요?” 그는 이렇게 답했다. “로드원 개통일이기도 하고 태퐁갈이기도 해요.” 태퐁갈. 스리랑카 힌두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라자팍세는 타밀 사람들의 명절에 맞춰 부랴부랴 로드원을 개통한 것이다. 기가 막힌 이벤트였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런데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숙소를 찾아 헤매야 했다.

보냐의 소동 이후, 우리는 중부 스리랑카를 거쳐 동부의 아루감 베이로 이동했다. 아루감을 비롯한 스리랑카 동부는 오랜 기간 타밀 반군의 점령 지역이었고, 라자팍세 집권기에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곳이다. 더군다나 아루감 베이 일대는 먼 옛날 바닷길을 타고 유입된 아라비아인의 후손이 많아 이슬람 문화가 강하고 신할리 스리랑카에 반감이 높다. 아루감으로 가는 길 중간 즈음에서 어깨에 AK-47을 걸친 정체불명의 젊은이 네다섯 명이 우리 버스에 올라탔을 때, 나는 이들이 선거 기간 이 지역을 특별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 군인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투표일 저녁, 아루감 베이의 모든 전화가 끊겼다. 그 후 이틀 동안 동부에서 서부로 나가는 교통편이 끊겼다. 사람들은 폰세카가 투표 다음 날 체포되었다고 말했다. 라자팍세가 90% 지지를 얻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아루감은 조용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라자팍세는 2015년 3선에 도전하던 중 자기 심복에게 패했다. 라자팍세는 북부와 동부뿐만 아니라 불교 중심지 캔디와 수도 콜롬보에서도 버림받았다. 이후 라자팍세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지만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라자팍세는 여전히 국제사회로부터 전쟁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나는 독재를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 속한다. 나는 어린 시절 전두환이 어떻다는 말만 들었을 뿐 실제로는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대에 가치관이 형성된 세대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지, 독재는 어떻게 나타나서 작동하는지 생생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항상 정치·사회적으로 뭔가를 경계해야 할 것 같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뭘 경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 때문에 나는 2010년 초 스리랑카에서 보았던 독재의 풍경을 정말 강렬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준 경험으로 기억한다. 라자팍세는 좋은 반면교사였고, 나는 오늘도 스리랑카를 잊지 못한다.

기자명 김명철 (심리학 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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