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에 벌어진 몽골과의 30년 전쟁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 네게 몽골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사람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국사 시간에 배우긴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릴 거다. 하지만 몽골과의 전쟁은 우리 역사상 손꼽히는 거대한 국난(國難)이었어. 최초로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넌 것이 1231년 1월이고 고려의 세자가 원나라의 세조가 되는 쿠빌라이를 만나 항복 의사를 전한 것이 1259년이야. 고려 조정이 피란 수도이자 저항의 상징이었던 강화도에서 완전히 나온 것이 1270년, 몽골의 지배를 거부한 삼별초가 최종적으로 진압된 것이 1273년이었다. 짧게는 30년 길게 보면 40년 동안, 고려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고 보면 될 거야. 그야말로 기나긴 전쟁이었지.

1차 침입 때 일단 머리를 숙이고 화친을 맺었지만 고려를 지배하던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 최이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몽골에 저항할 태세를 갖춰. 강화도는 빠른 물살과 허리까지 빠지는 갯벌, 그리고 한강과 임진강에서 떠내려오는 얼음덩이들로 항해가 불가능해지는 겨울까지 두루 갖춘 천혜의 요새였다. 이에 더해 이중 삼중으로 성을 쌓고 고려 최고의 정예부대까지 버티고 있던 바, 천하의 몽골군도 강화도를 넘보지는 못했어. 그러나 고려 정부가 피란 수도 강화도에서 안전하게 지낼 때 육지의 백성들은 몽골군의 파도와 같은, 즉 몰려왔다가 물러가고 또다시 들이닥치는 공세에 시달려야 했지.

ⓒ위키백과30년 넘게 지속된 고려와 몽골의 전쟁(위 삽화)은 한국 역사상 손꼽히는 거대한 국난이었다.

고려 백성들은 열심히 싸웠어. 하지만 상대는 세계 제국을 이룩한 몽골이었어. 몽골은 끊임없이 몰려왔고 마침내 고려의 힘도 한계에 달하면서 백성들도 지칠 대로 지친다.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조정의 관리나 지휘관을 붙잡아 몽골군에 넘기거나 되레 몽골군을 환영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어. 나라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는 최씨 정권과 그 허수아비인 왕을 두고 몽골 사신이 던진 말은 매우 뼈아프다. “대군이 들어와 하루에도 죽는 자들이 수도 없는데 고려 왕은 어찌 자기 한 몸만 아끼며, 만민의 생명은 돌보지 않는 것입니까?”

마침내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게 된다. 연로한 임금 대신 세자가 몽골에 들어가 쿠빌라이에게 항복했어. 마침 몽골의 칸인 뭉케(쿠빌라이의 형)가 남송을 공격하다가 사망해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 칸 자리를 두고 싸워야 했던 쿠빌라이는 고려의 항복을 기쁘게 받아들여. “당 태종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의 세자가 제 발로 걸어왔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칸이 된 쿠빌라이는 고려에 왕조의 제도와 풍속을 유지할 수 있다는, 몽골로서는 파격적인 선언을 한다. 쿠빌라이 칸 스스로 “고려만큼 예를 가지고 대하는 나라가 없다”라고 자처할 만큼….

그러나 고려의 고난은 끝난 게 아니었어. 몽골이 바다 건너 일본을 넘보기 시작한 거야. 일본이 몽골에 복속하지 않으면 곧 전쟁이 터질 판이었다. 고려 조정도 난감했지만 수십 년 전쟁에 지친 백성들로서는 가슴 터질 노릇이었지. 더욱이 쿠빌라이 칸에게 일본의 존재를 일깨워준 자는 다름 아닌 고려인이었다. 쿠빌라이의 편지야.

“그대 나라 사람 조이(趙彛)가 일본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고려 왕은 ‘풍랑 험하다’거나 ‘일본과 사귄 적 없다’고 핑계 대지 말고 사신을 보낼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라.”

하지만 일본은 몽골에 굽힐 마음이 없었다. 고려는 어정쩡한 처지가 됐어. 그런데 이 상황에서 쿠빌라이 칸에게 “고려가 일본과 합쳐서 몽골에 저항하려 합니다”라고 충동질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이들도 고려인이었지. 몽골 침략 와중에 저항을 포기하고 몽골에 항복한 사람들을 아빠는 이해해. 심지어 조정의 관리를 죽이고 몽골군을 환영한 사람들도 ‘반역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고려 정부가 그들에게 해준 것이 없으니까.

ⓒ위키백과쿠빌라이의 초상화. 30년 전쟁 끝에 고려의 세자가 몽골에 들어가 그에게 항복했다.

군사작전권도 없는 처지에 전쟁 운운하는 자들

하지만 자기 동포들은 어찌 되든 개의치 않고 강대국 군주의 비위를 맞추고 탐욕을 자극했던 고려인들은 반역자요 악당이며 무책임한 선동꾼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인배들과 그들을 업고 있던 대원제국(大元帝國:몽골이 세운 왕조) 황제 쿠빌라이에게 결연히 맞선 사람이 있었다. 이장용이라는 재상이었지.

그가 쿠빌라이에게 보낸 글을 보면 매우 예의 바르면서도 할 말을 다 한다는 느낌이 들어.

“일본에선들 어찌 대원제국의 위신이 높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들이 들었으면 당연히 들어와 조공하였을 것인데, 오지 않는 것은 바다 밖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일본은 아주 먼 곳입니다). 그러니 시간을 두고 서서히 일본의 동정을 살피다가, 오면 복종하게 하고(오면 좋고), 오지 않으면 버려두어 안 보이는 곳에서 제멋대로 살게 하는 것이 실로 황제의 은덕이 될 것입니다(안 와도 내버려두자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이장용이 쿠빌라이 칸에게 불려간다. 쿠빌라이는 고려 왕족 영녕군 준이라는 자로부터 “고려 군대가 5만씩이나 되니 일본을 치는 데 도움이 되고도 남습니다”라는 허튼소리를 듣고 있었지. 쿠빌라이는 고려 군대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이장용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30년 전란으로 인해 다 죽어서 없어졌습니다.”

이건 도발이었다. 적어도 대원제국 황제 쿠빌라이의 병력 요구에 이렇게 답할 자는 하늘 아래 없었을 거다. 쿠빌라이도 기가 막혔지. “너희 나라에는 여자가 없느냐? 죽은 자는 있고 태어난 자가 없다?” 몽골의 억센 무장들도 어깨를 움츠릴 쿠빌라이의 호통이었지. 이에 지지 않고 이장용은 대답했어.

“성은을 입어 (즉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 9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그때 태어난 아이들이래봤자 이제 9살입니다. 폐하의 군인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누가 보아도 억지였지만 천하의 쿠빌라이도 반박할 수 없었어. 그 억지는 하나의 절규였던 거야. ‘너희가 이렇게 우리를 초토화시켜놓고 무얼 더 요구한단 말인가?’라는 피울음을 이장용은 전달하고 있었던 거지. 하늘 아래 절대 권력자 쿠빌라이 앞에서 말이야. 그 쿠빌라이도 입맛을 다시면서 얘기했어. “정녕 아만 메루겐이로다(말의 명수로다)!”

그러나 결국 고려 백성들은 일본 원정의 부담을 져야 했다. 숱한 고려 장정들이 일본 땅에서 피를 뿌리고 남해 바다의 억울한 혼백으로 흩어졌어. 하지만 아빠는 수십 년 전쟁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라의 재상으로, 또 다른 전쟁에 백성들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장용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쿠빌라이 앞에서 “당신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우리나라 장정들은 다 죽어 없어졌다고! 전쟁 끝난 뒤에나 아이들이 태어났다고!”라며 목숨 걸고 항변하던 그의 기개와 함께 말이지.

몽골의 침략에 고려는 치열하게 항전했어. 그러나 전쟁이란 정의롭든 그렇지 않든 나라를 망가뜨리고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요즘 들어 전쟁이라는 소리를 함부로 내뱉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빠는 견딜 수 없게 슬프다. 군사작전권도 갖고 있지 않은 처지에 ‘대통령이 김정은을 제거할 결심을 해야 한다’느니 운운하며 떠드는 족속들이, 과거 쿠빌라이 옆 고려인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또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며 테러방지법을 그토록 목 놓아 떠들다가 정작 ‘국가테러대책회의’ 의장이 자신이라는 사실도 몰랐던 총리를 본다면, 고려 재상 이장용은 몽골 말로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오오, 탱그리시여(오오, 하늘이시여).”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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